[단독] '39년 삼성맨'은 왜 중국기업으로 가게 됐나 [황정수의 반도체 이슈 짚어보기]

입력 2020-06-12 08:50   수정 2020-10-08 13:22


지난 11일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가 술렁였다. 삼성전자 LCD(액정표시장치) 패널 사업에 한 획을 그은 장원기 전 삼성전자 사장(사진·66)이 중국 반도체 기업 '에스윈' 부회장(부총경리)으로 옮겼다는 소식 때문이다. 에스윈은 중국 1위 디스플레이업체 BOE를 일군 '중국 LCD 대부' 왕동성 전 회장이 일하고 있는 기업이다.

대부분의 기사엔 '40년 삼성맨 중국 반도체 기업行', '반도체 인력·기술 유출 논란' 등의 제목이 달렸다. 장 전 사장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댓글도 적지 않았다.

장 전 사장의 중국행(行) 소식을 듣고 '왜'란 생각이 들었다. 1981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S-LCD(삼성·소니 합작법인) 대표, LCD사업부장(사장), 중국삼성 사장, 중국전략협력실장(사장) 등을 역임한 '39년 삼성맨'이 중국 업체를 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장 전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한국에 있었다. "내 기사 댓글을 보고 속상해하는 가족들을 달래고 있었다"고 했다. 장 전 사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본인의 선택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기술 유출 우려에 대해선 "30년 전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 엔지니어였고 10년 전 LCD사업부에서 나왔다"며 "유출할 기술이 없다"고 단언했다. 왕동성 전 BOE 회장이 '경영 지혜'를 나눠달라고 요청했고 그와의 친분 때문에 수락한 것이란 얘기다. 장 전 사장은 "깊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후회하지만 한국과 삼성에 피해가는 일 없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기업 에스윈에 합류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동성 전 BOE 회장과의 인연 때문입니다."

▶어떤 인연입니까.
"중국삼성 사장으로 2012년부터 2017년까지 6년 간 근무했습니다. BOE에 삼성전기 콘덴서, 삼성SDI 편광판, 삼성전자 드라이버IC 등 삼성 제품을 팔았습니다. BOE에서 만드는 소형 LCD 패널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와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VD)사업부에 소개해줬습니다. 왕 회장이 상당히 고마워하더라고요. 이후 저한테 '따거'(큰 형)라고 부를 정도로 친분이 깊어졌습니다."

▶왕 회장이 에스윈 합류를 요청하던가요.
"2015년 왕 회장이 '회사 그만두면 뭐할거냐'고 묻더군요. '삼성 자문하다가 놀겠다'고 답하니까 '같이 놀면서 사업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난 삼성맨이고 한국에서 사업하면 삼성 선·후배들과 다 연결이 되기 때문에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자금도 충분하지 않고요. 그러니까 '잘됐다. 그러면 중국에서 함께 놀자'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작년 왕 회장이 BOE에서 정년퇴직하자마자 '따거, 옛날 얘기한 거 기억나. 회사 같이 하자'고 다시 요청했습니다."

▶중국 기업인데 부담스럽진 않으셨습니까.
"너무 가볍게 생각했는 지 모르겠지만, 왕 회장과의 의(義)를 생각했습니다. 고심 끝에 수락할 땐 "난 삼성맨이고 삼성하고 경쟁되는 건 못한다"고 먼저 얘기했습니다. 부회장(부총경리)라고 알려진 직함도 거부했는데, 억지로 단 것입니다."


▶한국기업에서 일하는 건 생각 안하셨습니까.
"전 삼성전자에서 39년 일했습니다. 삼성 선후배들이 한국 산업계 곳곳에 일하고 있습니다. 특정 한국 회사에 몸 담게 되면 일부 선후배만 도와주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담스러웠습니다."

▶에스윈은 어떤 회사입니까.
"먼저 사실관계부터 바로잡자면, 제가 일하게 된 곳은 반도체기업이 아닙니다. '에스윈과기그룹'이란 지주회사 같은 곳의 부회장 겸 이사입니다. 물론 계열사 중엔 '에스윈전산과기그룹'이란 반도체 팹리스(설계전문기업)가 있습니다. 이 회사는 통신반도체, 디스플레이구동칩, AI(인공지능)칩 등을 설계합니다. 그리고 COF(칩온필름)라고, 디스플레이 조립할 때 쓰는 필름을 만드는 계열사가 하나 더 있고, 나머지는 반도체 원료인 웨이퍼를 생산하는 곳입니다. 웨이퍼와 COF는 삼성도 필요로 하는 제품입니다. 삼성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죠."

▶'기술유출'이란 비난이 나오는데요.
"(한숨) 제가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서 나온지 그만둔 지 30년 지났습니다. 반도체사업부에서 일할 때도 반도체 건식식각 '공정' 엔지니어였습니다. 제가 일했던 시절은 1M D램 시절입니다. 무슨 반도체 개발 기술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LCD사업부장 맡은 것도 10년 전 일입니다. 나이 66세 먹은 사람이 무슨 기술이 있어서 기술을 유출하겠습니까." (삼성전자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그는 과장 시절 반도체사업부에서 나와 LCD사업부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면 무슨 일을 하십니까.
"왕 회장이 '전략적인 큰 그림이나 좀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회사에 들어간 제 돈도 없습니다. 한 달에 한 주 정도 중국에 머무르면서 경영자문하는 역할입니다."

▶경영 노하우 전수네요.
"저같이 나이든 사람 머리 속엔 '지혜'가 있습니다. '기술'이 아닙니다. 지혜를 나누는 것까지 통제당하면, (한 숨)답답합니다. 우리가 안 가면 일본 사람이 가고 미국 사람이 (중국에)갑니다. 이미 '글로벌 원 월드(global one world)'인데…"

▶전직 삼성 사장이라서 이런저런 얘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만.
"전 아직 몸이 건강합니다. 40년 일하다가 2~3년 놀아보니까 사람 할 짓이 아니더라고요. 소일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의 있거나 일 있으면 가는겁니다."

▶비난이 신경쓰이지는 않으신지요.
"1955년에 태어나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던 제가 삼성 사장까지 한 것에 대해 회사와 대한민국에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한국과 삼성에 반하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제가 먼저 (그런 요청을) 끊겠습니다. 그 정도 안목이 없진 않습니다."

▶한국 은퇴자들을 중국기업들이 '모셔가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모셔간 사람 없습니다. 중국은 1년에 대졸 이상 학력자가 780만명이 나옵니다. 그 중에 석박사가 80만명이 나온다. 우리 대졸자 70만명보다 많습니다. 중국에서 LCD를 처음 시작해서 지금까지 일해온 인력이 4000명 넘습니다. 한국 기술 인력에 대한 수요가 크지 않습니다."

▶한국 LCD가 중국업체에 밀리는 상황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가슴아픕니다. 개인적으론 중국 업체에 진 게 아니라 한국 기업들의 '전략적 실패' 영향이 큽니다. 2011년에 한국기업들이 11세대 LCD 투자했으면 중국 업체들이 못 따라왔을 겁니다."


통화 내내 장 전 사장은 '39년을 몸 담았던 삼성에 부담을 주는 게 아닌 지'에 대해 걱정했다. 삼성전자의 현직 임원은 장 전 사장에 대해 "LCD사업부장 시절인 2010년 사내 블로그를 직접 운영하며 후배들과 활발하게 소통했던 게 기억난다"며 "후배 결혼식 주례를 설 정도로 회사와 직원들을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장 전 사장이 블로그에 올린 LCD 사업 관련 글들은 '삼성 LCD 역사 교과서'로 불릴 정도로 큰 호응을 얻기도했다.

'계속 일하고 싶은 의지'와 '곱지 않은 시선' 사이에서 장 전 사장의 고민은 깊어 보였다. 그는 인터뷰 마지막에 "일하고 싶은 마음, 왕 회장과의 '의리' 때문에 중국 일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일이 커져서 답답하고 가슴아프다"고 토로했다. 이번 일에 대해선 "내 평생에 제일 어려운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와 맞물린 중국의 산업 굴기(?起). 경험 많은 한국 고위 경영자들을 원하는 중국 등 외국 기업들의 수요는 계속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산업계에선 현장에서 은퇴를 시작한 50~60대 한국 대기업 임원들이 장 전 사장과 같은 상황에 직면하는 사례가 계속 나올 수도 있다.

한국이 장 전 사장 같은 산업계의 자산을 끌어안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경험 많은 은퇴자들이 과도하게 오랜 기간 손발이 묶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 LCD 사업을 개척했던 장 전 사장이 은퇴자들의 '인생 2막'과 관련해 어떤 이정표를 남길 수 있을지 주목된다.

<장원기 전 삼성전자 사장 약력>
△대구 출생(1955년) △경북고 졸업(1974년) △연세대 화학공학과 졸업(1981년) △삼성전자 입사(1981년) △S-LCD 대표이사(2004년) △삼성전자 LCD사업부장(2008년) △중국삼성 사장(2012년)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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