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충정로엔 지은 지 90년 가까운 아파트가 흉물처럼 서 있습니다. 벽에 금이 많이 가 있는 지상 4층짜리 공동주택인데 하수구 냄새가 밖에까지 적지 않게 나는 곳입니다. 그래도 이 아파트는 철거된 후 새 아파트로 변신하기 어렵습니다. 서울시가 작년 ‘문화 시설’로 지정했기 때문이죠. 서울시의 ‘흔적 남기기’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흔적 남기기 사업은 곳곳에서 갈등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재개발 사업 과정에서 ‘청량리 588’ 등 성매매 집결지 일대를 역사 생활문화 공간으로 만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거센 반발이 일었지요. 건축 가치가 전혀 없는 쪽방촌을 보존한다는 계획이 추진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 보존 가치가 있는 시 자산”이란 거지요.
1970~1980년대 ‘개발독재’ 시절 지어졌던 노후 아파트의 굴뚝이나 건물을 ‘문화 유산’ 명목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도 등장했습니다. 실제로 서울 강남구 개포주공 4단지는 시의 요구에 따라 종전 58개 동 가운데 2개 동을 허물지 않고 보존하는 방식으로 아파트 건설 공사를 진행하고 있지요.
“수 십년 된 낡은 아파트를 남겨 놓으면 흉물이 될 것”이란 비판이 나왔지만 공사에 대한 인·허가권을 갖고 있는 서울시 벽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조합원들 입장에선 중요한 재산권 문제이지만 ‘재건축은 속도가 관건’인 상황에서 지방자치단체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송파구 잠실주공 5단지, 개포주공 1단지, 반포주공 모두 같은 처지입니다. 시가 잠실주공 5단지에 대해 “굴뚝과 아파트 1개 동을 남기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조합 측은 대놓고 반발하기 어렵습니다. 지자체가 막강한 인·허가권을 휘두르고 있어서지요. 잠실주공 5단지 조합 관계자는 “서울시와의 협의 끝에 굴뚝은 존치하지 않기로 했다”며 “아파트 한 동은 남기는 것으로 결정됐지만 이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놓고 논란이 클 수밖에 없는 구시대 건축물에 대해 제대로 된 공론화 절차 없이 추진되고 있다는 겁니다. 일부 위원회가 가동 중이지만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는 지 의문입니다.
특정 총괄 부서가 아니라 여러 개 부서가 ‘알아서’ 유물을 지정하고 있어 통일된 기준을 적용하기도 어렵습니다. 예컨대 서울시 내에선 문화정책과와 도시재생실, 주택건축본부(공동주택과) 등이 관련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존치된 ‘미래 문화유산’들이 계속 보존·유지되는 데 국민 세금이 쓰이게 된다는 점도 향후 논쟁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강남 주택단지 안에 남게 될 ‘옛날 아파트’의 운영·관리 비용은 거주민들이 아니라 지자체 세금으로 충당하게 됩니다. 각 조합이 울며 겨자먹기로 기부채납한 ‘유물’의 관리 책임이 각 지자체에 있기 때문이죠.
지자체가 낡은 건물을 존치해야 한다면, 그 목적이 정말 미래유산을 남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부동산값 상승을 막기 위해서인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