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미국 국내 정치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국가안보 이슈를 자신의 정치적 전망에 종속시켰고, 베이징의 인권탄압을 도외시했다”며 “트럼프의 중국 정책 스캔들”이라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볼턴이 (회고록 집필 과정에서)법을 위반했다”며 반발했다. 미 법무부는 회고록 출간 저지를 위해 법원에 긴급명령을 요청했다. 미 대선이 4개월여 밖에 남지 않은 가운데 볼턴 변수가 대선판을 흔들 뇌관으로 떠오른 것이다. 볼턴은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후계자이자 ‘슈퍼 매파’로 2018년 4월부터 1년5개월간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북한, 이란, 탈레반 등 대외정책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마찰을 빚은 끝에 ‘트윗 해고’를 당했고 이후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뉴욕타임스(NYT)은 17일(현지시간) 논란이 되고 있는 볼턴의 회고록 《그 것이 일어난 방:백악관 회고록》 일부를 발췌해 소개했다. 회고록은 오는 23일 출간 예정으로 알려졌다.
회고록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대목은 지난해 6월 일본 오사카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기간에 열린 미·중 정상회담이다. 볼턴은 두 정상간 대화를 거론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대선에서)이기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고 적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농민, 중국의 대두와 밀 수입 확대가 선거 결과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시 주석이 긍정적으로 화답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은 300년래 가장 위대한 중국 지도자”라고 치켜세웠다가 몇분 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수위를 더 높였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 대선의 핵심 승부처인 중서부 팜벨트(농업지대) 표심을 얻기 위해 중국에 농산물 구매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볼턴 보좌관은 이를 두고 “트럼프의 마음 속에 자신의 정치적 이익과 미국의 국익이 섞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나는 백악관 재직 시절 트럼프의 중요 결정 가운데 재선을 위한 계산에서 나오지 않은 게 하나라도 있는지 찾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볼턴은 2018년 12월 아르헨티나에서 있었던 미·중 정상회담에서도 “트럼프는 농업 지역을 돕기 위해 단지 중국의 농산물 구매 확대만을 요구했다”며 “만약 그렇게 합의했다면 미국의 모든 (대중국)관세가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민주당 탄핵 옹호론자들이 우크라이나 문제에만 너무 집착하지 않고 시간을 들여 트럼프 외교정책 전반에 걸쳐 그의 행동을 더욱 체계적으로 조사했다면, 탄핵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국가 이익을 희생시켰음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에서 군사비 원조를 대가로 민주당 대선후보인 조 바이든 부자의 뒷조사를 요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는 정치권에서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번졌고 미 하원은 트럼프 대통령을 탄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하원 탄핵으로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볼턴의 회고록 폭로로 이번에는 ‘차이나 스캔들’이 불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이뿐 아니다. NYT는 볼턴이 회고록에서 “(트럼프 대통령이)자신이 좋아하는 독재자들에게 사실상 개인적 혜택을 주기 위해 몇몇 범죄수사들을 중단하고 싶다는 의향을 표현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터키 국유은행 할크방크, 중국 통신장비 업체 ZTE 등에 대한 미 정부의 수사에 개입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6월 홍콩 송환법 반대시위가 벌어졌을 땐 “개입하고 싶지 않다”며 “우리도 인권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볼턴은 썼다.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달 중국 톈안먼 사건 30주년 추모일에는 백악관의 성명 발표를 거부하며 “그건 15년 전의 일”이라는 부정확한 언급과 함께 “누가 그 일을 상관하느냐. 난 협상을 하려고 한다”고 말한 것으로 회고록에 소개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의 인권 탄압 문제를 무시했다는 지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밖에 영국이 핵 보유국인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서 거의 탈퇴할뻔 했다고 볼턴은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간단히 말해 그는 법을 어겼다”며 “이는 극비사항”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볼턴은 임명 당시부터 “가망 없는 사람”였다고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법무부는 회고록 출간을 막기 위한 조치를 법원에 요구했고, 백악관은 전날 법무부와 함께 회고록 출간을 연기해달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회고록이 국가기밀을 준수했는지 여부에 대한 검토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볼턴측 출판사는 성명에서 정부 조치에 대해 “정치적 동기에 따른 무의미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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