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한 송이를 담은 흑백 사진이 사람 키보다 크다. 가로 1m, 세로 2m로 인화했는데도 촘촘히 박힌 포도알 하나하나가 선명하다. 검은색으로 윤이 나는 포도알 표면에 앉은 흰색 분가루, 약간 쭈글쭈글해진 일부 포도알의 주름까지 선명하다. 알맹이마다 표정이 살아있다고 할까. 손바닥만 한 포도송이를 이렇게 확대해 놓으니 전혀 다른 느낌이다.
젊은 사진작가 고려명(37)은 하이퍼리얼리즘을 추구한다. 디지털카메라가 날로 발달하는데도 구식 아날로그카메라와 필름을 고집하는 이유다. 그는 독일제 대형 카메라에 우주관측용 필름을 넣어 촬영한다. 몇 미터짜리 대작으로 제작해도 이상이 없다고 한다.
하이퍼리얼리즘의 목표는 대상의 정밀한 재현이 아니다. 아무리 정밀한 묘사도 실제와는 달라서다. 극사실주의적으로 확대된 이미지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함으로써 대상에 관한 전혀 다른 시각과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22일 개막한 고려명 초대전 ‘투영Projection’은 극사실주의 사진 작업을 비롯해 고 작가의 작업 전반을 선보이는 자리다. 대형 카메라로 근접 촬영한 포도송이, 잠자리와 매미 날개, 말린 장미 등의 컬러 및 흑백 작업과 사하라 사막 사진 등 25점을 걸었다.
매미 날개는 옛날 임금이 썼던 익선관(翼善冠)에 모양을 본떠 만들었을 정도로 청빈, 염치, 겸손 등의 좋은 상징을 내포한다. 포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붉은 장미를 확대한 사진은 마치 거대한 우주가 폭발하는 장면 같다.
백색 바탕에 있는 듯 없는 듯한 팝콘 사진도 흥미롭다. 하얀 종이에 팝콘을 올려놓고 노출을 길게 해서 찍은 작품이다. 고 작가는 “질량감의 발견”이라고 했다. 무심코 지나치다 발견한 팝콘의 존재감이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것. ‘투영’이라는 이번 전시 주제에도 가장 잘 부합한다는 설명이다.
“투영의 사전적 의미는 그림자를 비춘다는 것이지만 작가에겐 자신이 읽어들인 것이나 바라본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작품은 대상이 작가가 받아들이고 투영한 결과니까요.”
고 작가의 국내 최종 학력은 중학교 중퇴다.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 3학년 때 그만두고 미국 뉴욕을 거쳐 프랑스 파리 스페오사진학교에서 사진을 공부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열 살 때부터 접했던 사진이 그에게 세상을 보는 창이 됐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해외에서 보낸 그는 혼자서 공부하는 데 익숙하다. 독서를 좋아하고, 박물관과 미술관도 자주 찾는다. 그는 “책과 박물관에서 읽고 본 것에 살을 붙인 것이 내 사진”이라고 강조했다.
파리 시절 찍었던 ‘백자’도 그런 바탕에서 나왔다. 박물관에서 본 백자의 곡선을 여인의 뒷모습에서 발견한 것. 뒤돌아 앉은 모델에게 좌우로 몸을 흔들게 하고 진폭에서 겹치는 부분을 긴 노출로 잡아내자 백자의 곡선이 드러났다. 이번 전시에 건 가로 2m, 세로 1m의 사하라 사막 사진은 ‘광대무변한 세상을 한 장의 필름에 압축해 넣는 즐거움’을 선사했다고 한다.
2011년부터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하다 지난해 4월 귀국했다. 앞으로는 파리 시절 시작했던 인물 사진을 다시 찍을 계획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복잡할 땐 사막 사진을 보세요. 번뇌가 사라지고 무심(無心)하게 될 겁니다. 우울할 땐 포도 사진을 보세요. 기분이 좋아집니다.” 전시는 7월 16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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