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발간이 도화선이 된 ‘회고록 전쟁’이 적지 않다. 이번엔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이 난리다. 볼턴이 자신을 해고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역대급 ‘회고록 폭탄’을 퍼부은 것이다. 트럼프는 “거짓말과 지어낸 이야기 모음”이라고 일축했지만 인터넷에 해적판이 풀려 파장이 일파만파다. 한국도 싸움에 소환됐다. 볼턴은 문재인 대통령의 비핵화 구상에 대해 “조현병 같은 생각”이라고 비난했다. 급기야 어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사실을 크게 왜곡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미국 조야에는 볼턴을 편드는 이가 별로 없다.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마저 “애국보다 인세를 택했다”고 꼬집었다. 볼턴이 ‘회고록 돈벌이’를 위해 국익을 발로 찼다는 얘기다.
회고록은 ‘정치보복 최후의 장’이란 말이 있다. 정치공방을 벌이다 가장 마지막에 집어 드는 무기인 셈이다. 사실을 담았다고 해도 본인 주장에 기운 ‘기억’에 의존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20세기 국제정치를 쥐락펴락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의 회고록도 ‘자신을 둘러싼 논란의 과거사를 윤색한 내용뿐’이란 혹평을 받았다.
이와 달리 훈훈한 회고록도 있다. 최근 타계한 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회고록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는 가난했던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대화가 나온다. “경제가 잘 돼야 정치·국방도 튼튼할 수 있다”는 대통령의 제안에 김씨는 바로 설복돼 비서실장을 맡았다고 한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어떤 여정》에서 후임자 고든 브라운에 대해 “분석적 지능 끝내 줌. 정서적 지능은 제로. 고든은 요상한 친구”라는 재미있는 코멘트를 남겼다. ‘악플’처럼 상처만 주는 회고록보다 ‘선플’이 많이 담긴 회고록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는 어려울까.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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