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맥] "곧 닥칠 재정위기…중립적 재정감시기구 만들자"

입력 2020-06-30 18:03   수정 2020-07-01 00:10

20년 전인 2000년 4월, 제16대 국회의원 총선은 국가채무라는 재정 문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등장한 유별난 선거였다. 김대중 정부는 1997년 외환위기 극복을 치적으로 내세우며 선전을 다짐했으나 야당인 한나라당은 전면광고를 통해 나랏빚 문제를 본격 제기했다. 외환위기 극복은 재정이라는 아랫돌을 빼서 금융부실에 윗돌을 괴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이 논쟁은 수십 표 차이로 당락이 좌우되던 지역구에서 여당인 민주당이 많은 의석을 잃은 주요인이 됐다. 불과 2년 전 대외채무로 인해 가정 파괴와 노숙자 양산을 경험한 우리 국민으로서는 빚이라면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정부 발표 국가채무에 정부보증채무, 한국은행의 통화안정증권, 국민연금 관련 잠재채무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기획재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국제기준을 내세우며 이들이 국가채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반격했다. 많은 선거 전문가는 정책 논쟁이 총선 이슈가 되는 것을 반겼지만 학술적인 내용조차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국가채무 논쟁은 매년 예산철만 되면 반복적으로 제기됐으나 정부 여당은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국가채무를 둘러싼 논쟁은 IMF의 국제기준을 확인하고 관련 전문가들이 통계를 정비하면 끝날 일이었지만 정부 여당은 자신들의 재정 운용에 부담이 될까봐 차일피일 그 해결을 미루고 있었다. 국제기준에 의한 ‘일반정부 부채’ 규모가 기존에 계산돼온 국가채무와 크게 차이 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런 미온적 태도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로 이어지며 12년간 계속됐다. 이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이었던 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기재부는 닷새 뒤인 2012년 12월 24일 ‘일반정부 부채’를 발표했다. 나아가 박근혜 정부는 2014년 다양한 채무지표, 즉 국가채무(D1), 일반정부 부채(D2), 비금융공공부문 부채(D3)를 공개하며 재정통계의 기본 틀을 정비했다. 2000년 제기된 국가채무 논쟁을 우리 사회가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에 거의 15년 세월을 허비한 것이다.


정부 여당에 불리한 재정 이슈가 이 핑계 저 핑계로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비단 국가채무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는 2006년 ‘비전 2030’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의 장기재정운용 방향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임기 중 복지 지출의 획기적 증대를 도모했다. 한국의 복지 지출 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기에 장기적인 시계를 통해 증세와 국가채무 증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모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전 2030’은 중장기적 재정전망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채 희망적인 정책만 나열함으로써 정치적 추동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후 공식적인 장기재정전망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으나 간헐적인 연구에서 그 결과가 비관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돼 정부 여당은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비관적인 전망은 재정 확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정부 여당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여당이 장기재정전망에서 고개를 돌려버리자 국회가 그 동력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2012년 국회예산정책처는 2060년까지의 장기재정전망 보고서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공식 발간했다. 여기서는 다양하고도 풍부한 통계지표를 통해 한국의 장기적인 재정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정부 여당에 부담이 되는 장기재정전망을 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행정부 견제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여소야대 국회에서 야당인 한나라당 주도로 2003년 설립됐다. 물론 2004년 총선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압승하며 정치적 이유로 초대 예산정책처장을 갈아치웠지만,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에서는 행정부 견제라는 설립 본연의 취지가 나름대로 유지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회예산정책처는 2012, 2014, 2016년에 장기재정전망을 발표할 수 있었다. 세 차례의 보고서는 한결같이 2030년대 중반부터 한국 재정에 큰 위기가 온다는 것을 경고했다.

국회에서 연이어 발표되던 장기재정전망은 점점 더 기재부를 압박했다. 2015년 12월 기재부는 처음으로 장기재정전망을 공식 발표했다. 국회예산정책처의 전망과 동일하게 잠재성장률 둔화, 재정수입 증가 둔화, 복지제도 성숙, 저출산·고령화 등으로 장기적 재정여건이 매우 어렵다고 실토했다. 국민연금 등 사회보험에서는 기금 고갈로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기대하기 어렵고, 또 사회보험을 제외한 일반재정에서도 복지제도를 추가로 도입하지 않을 때 그나마 지속가능하다고 했다. 마침내 기재부는 2016년 10월 재정건전화법을 입법예고하며 재정준칙을 설정하기 위한 논의에 나섰다.

이렇게 공감대를 모아가던 재정준칙에 관한 논의는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돌변했다.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가 수립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의 국정과제별 재원 방안은 3개월 뒤의 2018년도 예산안에서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 그 어느 정부보다 확장재정에 진력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기조는 서서히 국정 담당자들의 분위기를 장악했다. 국회예산정책처조차 2018년도 장기재정전망에서 재정건전성에 대한 경고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최종 전망연도를 2050년으로 축소하고, 또 2050년의 국가채무비율을 그 근거에 대한 설명도 없이 111.0%에서 85.6%로 하향 조정했다. 인구 상황은 더 나빠지고 경제성장률은 지속 하락함에도 불구하고 국가채무비율이 전반적으로 개선되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이제 정부 여당 내에서는 케인지언의 경기부양 그리고 개별 국가 사정을 도외시한 OECD 평균과의 어설픈 비교 목소리만 들리고 있다. 보다 균형있는 거시경제이론, 소규모 개방경제로서의 우리 현실을 강조하는 목소리는 보수적인 신문의 지면과 퇴직 관료들을 통해 간헐적으로 들릴 뿐 정치적 공론의 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 국민도 재난지원금에 취해 들뜬 마음으로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복지제도의 도입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1998년 외환위기에서 빚이라면 치를 떨던 당시 40~50대 중년층은 이미 은퇴해 국가적 위기보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는 앞으로 맞닥뜨릴 재정위기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산전수전을 겪어본 모범적 선진국의 경험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재정준칙을 설정함과 동시에 이를 감시하는 기능이 충분히 작동하도록 상당한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다. 정치인과 정당의 건전하지 않은 공약에 대한 객관적 데이터를 제공해 선거 과정에서 여론상 불이익을 주는 것이다. 정치중립적 여론이 힘을 얻을 때 직업공무원제에서 안정을 누리는 공무원들도 그 중심을 잡아나갈 수 있다. 정치중립적 감시기구의 중요성,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네덜란드 CPB, 선거 공약에 재정평가 보고서 공표…'재정 포퓰리즘' 막아
EU, 회원국에 재정기구 설치 요구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그에 따라 촉발된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는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재정건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일깨웠다. 금융위기는 재정위기를 수반하고, 재정위기는 반드시 금융위기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포퓰리즘적 공약을 남발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들은 재정건전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재정환상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며 유권자들을 현혹한다. 그렇다면 대의민주주의를 유지하면서 재정건전성을 지켜낼 수 있는 제도적 방안엔 과연 무엇이 있는가?

많은 전문가와 국제기구는 독립재정기구(Independent Fiscal Institution)를 그 해답으로 주목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13년부터 유로존 회원국(유로화 사용 19개국)에 독립재정기구 설치를 요구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13년 재정준칙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독립적인 재정위원회 설치를 권고했다. 통화정책에서 독립적인 중앙은행이 존재하는 것처럼 재정 운용에서도 점차 이런 기구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12년 회원국에 ‘독립재정기구의 운용에 대한 권고사항’을 제시한 데 이어 2016년에는 18개 회원국의 사례를 깊이있게 비교 분석했다.

독립재정위원회로도 불리는 독립재정기구의 권한, 업무, 거버넌스 형태는 국가별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핵심적인 임무는 일반 국민에게 재정 운용과 관련해 체계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재정건전성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는 일이다. 이들이 재정정책을 직접 결정할 수는 없지만 재정 운용에 관한 정치적 여론이 올바르게 형성될 수 있도록 일반 국민에게 정치중립적 평가보고서를 지속 제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능을 모범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독립재정기구의 대표적 사례로 네덜란드의 경제정책분석국(CPB)을 들 수 있다. CPB는 선거 과정에서 각 정당의 선거공약에 대해 객관적인 재정평가보고서를 공표함으로써 포퓰리즘적 공약이 남발되는 것을 견제한다. 선거공약에 대한 평가는 1986년 시작됐는데 평가 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거의 모든 정당이 자신들의 공약이 정책적으로 신뢰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CPB에 평가를 요청하는 것이다. 심지어 국회를 해산할 때조차 CPB의 평가보고서 작성 기간을 고려해 총선일을 조정하기도 한다. 이런 전통이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네덜란드는 재정 포퓰리즘을 극복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한 연구에선 선거공약에 대한 재정효과 분석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재정적 영향을 평가하는 노력을 통해 정당들은 그들의 정치적 프로그램을 명확하게 했다. 이를 통해 정당이 훈련됐으며 막연한 희망이 정당 정치로 이식되는 것을 억제할 수 있었다. 과격한 정치는 잡초처럼 뽑혀 없어졌다. 정치적 논의는 재정적 효과를 파악함으로써 문명화하는 것이다.” 이는 네덜란드의 정치인들이 CPB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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