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과 휴일에 문을 연 약국을 찾아 전전긍긍하는 환자의 불편을 덜기 위해 약국 앞에 일반약 판매용 화상판매기를 도입하려던 계획이 또다시 미뤄졌다.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 실증특례 안건으로 올라가 사전심의까지 마쳤지만 석연찮은 이유로 논의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비대면 산업을 집중 육성하겠다던 문재인 대통령의 한국판 뉴딜 계획이 이익단체에 막혀 선언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 동작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박 소장은 2011년 의약품 화상판매기 특허를 출원했다. 약국 앞에 설치한 뒤 약사가 퇴근하면 환자가 먼 거리에 있는 약사와 화상통화를 통해 약을 살 수 있는 기기다. 2013년 시제품을 인천 부평에 설치해 2개월간 운영한 결과 환자 만족도가 높았다. 하지만 7년 넘게 제품을 출시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약사법에는 원격으로 약을 사고파는 것에 대한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 29일 박 소장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ICT 규제샌드박스 실증특례 사업으로 화상판매기를 선정해달라고 신청서를 냈다. 국내에서 2년간 시범적으로 사용해보자는 취지다. 지난해 5월 과기정통부가 신청서를 접수하고 1년이 넘었지만 아직 사업 시행 결정은 내려지지 않았다. 신청서 접수 후 50~90일 안에 심의위원회 의결을 하겠다던 규제샌드박스의 취지도 무색해졌다.
박 소장은 “일부 약사의 반대 때문”이라며 “지난해에는 총선을 앞두고 눈치를 보느라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문 대통령까지 나서 비대면 서비스를 육성하겠다고 했지만 일부 여당 의원이 사업에 반대했다”며 “국민이 아니라 이익단체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는 여당에 정책이 좌우되면 어떤 사업을 제대로 진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하지만 규제샌드박스 실증특례 사업을 통해서는 이익을 낼 수 없다는 게 박 소장의 설명이다. 시범사업이기 때문이다. 그는 “7년 동안 반대하는 측에서 안전성, 오작동 등의 문제를 제기해 철저한 보완 작업을 거쳤다”며 “모든 투약 내용이 기록되는 것은 물론 11개 효능군 제품만 판매하도록 제한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상판매기로 팔 수 있는 약은 전문의약품이 아니라 약국에서도 쉽게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이다. 이마저도 11개 효능군으로 제한된다. 24시간 냉장 보관하기 때문에 약이 상할 위험도 낮다. 환자는 약사가 선택해 눌러주는 약만 받아갈 수 있다.
박 소장은 화상판매기를 통해 약사들이 공익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도 했다. 생리대를 사기 어려운 청소년을 위해 무료로 생리대를 지급하는 기능도 포함했기 때문이다. 생리대 비용은 쓰리알코리아에서 부담한다.
약사는 약국이 문을 닫은 시간에도 추가 수익을 낼 수 있다. 늦은 시간 신입 약사 등을 채용하면 신규 일자리를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런 취지를 이해한 일부 약사는 화상판매기 설치에 찬성하고 있다. 그는 “동네약국과 환자에게 도움되는 정책이 정치 논리에 막혀 있어 답답하다”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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