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에 관용은 없다" 혹독한 데스크…전화로 기사 불러도 완벽한 문법

입력 2020-07-01 17:37   수정 2020-07-02 01:20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처음부터 기자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 법학과 여느 동기들처럼 법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사정 탓에 고시 공부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월급이 많은 투자신탁회사에 곧장 취직한 이유다. 동아일보 기자가 된 건 “친구들이 만날 때마다 다니던 회사 이름을 다시 묻는 게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28세 때 정치부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울 동교동 자택을 출입했다. 거물 정치인의 집에서 정치가 이뤄지던 시절이다. 동교동계의 ‘막내’ 설훈 민주당 의원은 “원고도 없이 유선전화로 속보기사를 불러주는데 정말 완벽한 문장을 구사했다”며 “아주 부지런했으며 민완 기자였다”고 기억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의원을 매우 아꼈다. 이 의원이 기자회견장에 없으면 티나지 않게 회견 시간을 미룰 정도였다. 1989년 평민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은 이 의원에게 고향인 전남 영광에서 출마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당시 동아일보 도쿄특파원에 내정됐던 이 의원은 이 제안을 사양했다. 더 큰 세계를 배우고 싶다는 꿈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 의원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낙연 기자를 기억하는 이석현 전 민주당 의원은 “항상 간담회가 끝나면 기자들이 나간 뒤 혼자 다시 와서 이것저것 캐물었다”며 “그래서 특종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 이 의원은 ‘전두환 정부의 금융실명제 연기’를 대표적인 특종으로 꼽았다. 한 의원으로부터는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정치부 차장, 국제부장 등 데스크로서 이 의원은 후배들에게 혹독했다고 알려졌다.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 때문이다. 오타를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보좌진은 물론 주변 의원들이 보내온 문자에도 오자가 있으면 이를 지적한다고 한다.

이 의원은 지금도 “모르는 게 많아 항상 부족하다”고 주변에 말한다. 이는 기자 때 터득한 교훈이다. 이 의원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 인생과 자연의 비밀은 너무 많고, 세상의 변화는 너무 빠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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