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의 서재] 모순된 케인스, 더 모순된 케인스주의 오·남용

입력 2020-07-08 18:16   수정 2020-07-09 00:13

대가(大家)의 인상은 대개 정형화돼 있다. 그러나 막상 그 삶과 저작을 깊이 들여다보면 놀랍도록 다채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20세기 거시경제학의 태두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가 그렇다. 미국 허핑턴포스트 선임기자 재커리 D 카터의 ‘케인스 평전’인 《평화의 대가: 화폐, 민주주의, 그리고 케인스의 삶》은 그런 발견의 즐거움을 준다. 5월 출간돼 영미 지식계에 큰 반향을 몰고 왔다.

케인스의 삶은 다채롭다 못해 모순으로 가득하다. 동성연애자이면서 미모의 발레리나와 결혼했고, 반(反)제국주의면서 대영제국 관료로 복무했으며, 평화주의자이면서 전비 조달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무엇보다 영국 신고전파 경제학의 충실한 제자이면서 그 기반을 뒤집는 학설을 내놨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삶의 바탕에 자리 잡은 끈질긴 비전을 꼽으라면 그것은 ‘올바른 정치를 통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종전처리 협상에 영국 대표로 파견됐을 때, 미국이 주도하는 전시부채 탕감안 또는 국제 통화결제 시스템을 제안한 것도, 자유방임주의를 부정한 것도 모두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 특히 국제정치의 리더십이야말로 불안한 세계 경제를 보완할 효과적 수단으로 봤다.

이 책에서 부각한 케인스의 진면목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인간 심리 존중이다. 미래에 무지한 상태에서 불확실성을 대하는 심리야말로 경제 행동의 결정적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불황기에 투자를 주저하고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동기는 합리적이다. 따라서 기대효용에 의거한 의사결정이 합리적이란 주장은 공허하다고 본 케인스야말로 어떤 의미에선 행동경제학의 선구자로 볼 수 있다.

둘째, 이념을 초월한 사회 통합을 꿈꾼 점이다. 그는 영국 보수주의 태두인 에드먼드 버크로부터 깊이 영향을 받았다. 혁명이 아니라 합리적·점진적 정책으로 사회를 진보시킬 수 있다는 신념이 거기서 나왔다. 동시에 프랑스 혁명사상가 장 자크 루소의 평등사상에도 영향받았다.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두 사상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믿은 케인스가 지금 극심한 좌우 대립을 본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이 책 내내 양차대전과 대공황의 격변기를 직접 경험한 케인스가 자주 언급한 ‘질서, 사회불안, 경제적 절망, 파국’ 같은 단어들이 유독 눈에 띈다. 그는 1차대전 직후 독일 채무탕감 합의를 이끌어낼 미국의 리더십을 바랐지만 미국은 그의 권고를 무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절망한 독일 대중의 심리를 파고든 히틀러 전체주의가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

케인스가 그토록 우려했던 사회 불안의 어둠이 현대사회, 특히 미국에 다시 드리우고 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1세기 전 국가 전쟁부채가 지금은 과도한 민간부채로 둔갑했다.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수습책으로, 그것도 케인스주의 정책이라는 취지로, 오히려 위기 주범인 금융회사에 구제금융을 제공했다. 몰락한 백인 중산층의 절망감이 지구촌 리더십을 포기하고 국익 우선주의로 회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낳았다.

돌이켜보면, 사회 통합을 이루는 데 정치의 힘을 강조한 케인스의 사상 자체가 후대 정치인들의 입맛대로 오용되고 포퓰리즘과 국가주의로 변질될 소지가 있었다. 1929년 총선에서 로이드 조지 영국 자유당 대표는 ‘우리는 실업을 정복할 수 있다’는 구호 아래 증세 없이 차입으로 공공사업을 일으켜 실업을 극복할 수 있다며 선거운동을 벌였다. 이는 케인스가 허버트 헨더슨과 함께 쓴 《로이드 조지는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라는 짧은 팸플릿에서 적극 옹호한 게 발단이었다.

대공황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독자적으로 뉴딜 정책을 추진했고, 케인스 사상은 나중에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동원됐다. 1차 뉴딜이 끝난 뒤인 1936년 발간된 케인스의 《일반이론》에도 적자재정 효과에 관한 중심적 서술은 거의 없었다. 그런 와중에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서구사회는 정부 지출의 위력을 실감했고, 전후 ‘큰 정부’가 자연스럽게 정착했다.

역시 모순이었다. ‘자유방임에는 결함이 있어 정부의 현명한 개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자신의 생각이 끝내 가장 혐오했던 국가주의를 뒷받침하는 도구로 오용됐으니 말이다. 그 결과 국가가 통화 증발과 재정 지출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횡행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송경모 <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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