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달리던 기마민족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약소국의 설움 속에서 우리가 꿈꾸고 닮고 싶었던 나라의 이미지다. 일본 학자 에가미 나미오가 주장한 ‘기마민족국가설’이 불을 지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고구려는 뛰어난 무장력을 갖춘 기마군단을 운용하는 동시에 정예 수군과 왕성한 해양활동으로 이름난 ‘해륙국가’였다.
한반도에선 20세기 초까지도 큰 배가 다닐 수 있는 18개의 강을 이용해 교통과 물류가 발전해왔다. 만주는 서북쪽 일부 초원과 건조 지대를 빼놓고는 송화강, 요하, 흑룡강, 모란강을 비롯한 60여 개의 강에서 큰 배들이 다녔다. 비록 사료에는 없지만 자연환경, 역사적 상황, 주변의 유적과 유물들을 보면 고구려 시대에도 강상(江上) 수군이 활동했다. 훗날 조선시대에 와서도 효종이 청나라에 파견한 병사들은 러시아군과 송화강에서 수상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1930년대 초 일본군은 흑룡강에서 강방함대(일본 관동군의 함대)를 운영했다.
고구려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오나라에 값비싼 담비가죽 1000장, 할계피(꿩가죽), 전략물자인 각궁(고구려의 활) 등을 보냈으며 두 나라는 우호관계를 발전시켰다. 제갈량이 죽기 1년 전인데, 그가 동이(고구려)를 의식한 인물이었으므로 이 일을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235년에는 고구려가 말을 수백 필 주었는데, 오나라는 사신선이 작아 80필만 싣고 갔다.
발전기에 들어선 고구려는 남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 지역을 차지하면서 군사력이 강력한 서북방의 유목종족, 정치력과 문화가 뛰어난 서남방의 중국세력, 동북방의 말갈계와 선비계, 그리고 남쪽에서 백제, 신라 등과 국경을 마주했다. 이런 포위망을 풀고 여러 나라를 이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divide and rule) 전략을 취하려면 기마군단을 활용하는 동시에 강력한 수군선단이 필요했다. 더구나 풍부한 말, 모피, 활, 인삼, 철 등의 자원을 수출하려면 육로 교통망과 해양 교통망을 연결한 해륙 네트워크의 허브여야 한다. 이런 국가 목표를 가장 적확하게 꿰뚫고 실천에 옮긴 이가 바로 광개토태왕과 그의 아들 장수왕이다.
태왕은 즉위하자 동서남북으로 공격을 펼치는 한편으로 외교관계도 맺었다. 원년에는 백제의 해양거점이었을 관미성(강화도설, 오두산성설이 있음)을 함락해 한강 하구와 경기만의 백제 함대를 무력화시켰다. 이어 396년에는 수군을 주력군으로 ‘한강수로 공격작전’ ‘인천 상륙작전’ ‘남양반도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 58개 성을 점령했다. 연안의 제해권은 물론이고, 서해 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차지했다. 이어 수도를 포위·압박한 후 백제의 항복을 받고 개선했다. 또한 압록강 하구인 서한만, 요동만, 묘도군도 일대와 동쪽의 장산군도 등에서 활동했으며 재위 20년째인 410년에는 훈춘, 포시에트, 블라디보스토크 등이 있는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일대까지 장악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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