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휴일 근무 때문에 국회로 출근했습니다. 국회 정문 앞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눈을 의심했습니다. 흑백으로 된 현수막에는 '故 박원순 시장님의 안식을 기원합니다. 님의 뜻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란 글자도 현수막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국회 정문뿐 아니었습니다. 서울 시내 곳곳에 이런 현수막이 일제히 걸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온라인상에서는 현수막을 두고 논란이 일었습니다. 네티즌들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라고 지적했습니다.
한국 사회의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은 2018년 1월 서지현 검사가 검찰청 내 성추행을 폭로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저는 그때 청와대를 담당했습니다. 서 검사 이후 미투 폭로가 잇따라 나오자 문 대통령은 당시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하면서 "곪을 대로 곪아 언젠가는 터져 나올 수밖에 없던 문제가 이 시기에 터져 나온 것"이라며 "특히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우리 정부의 성 평등과 여성 인권에 대한 해결 의지를 믿는 국민의 기대감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겠지만, 청와대 출입기자로서 문 대통령이 수치심과 두려움에 숨죽여 온 여성들의 '뒷배'가 되어 준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선언한 문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에 권력형 성범죄 폭로가 가능해진 건 분명해 보였습니다.
민주당의 현수막을 보며 문 대통령의 말이 떠오른 건 단순히 해당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염려해서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직장 상사의 성추행과 성희롱에 시달리며 폭로를 고민하는 또 다른 여성들이 길거리를 지나다가 민주당의 현수막을 마주하면 무슨 생각을 할까,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박 시장의 성희롱 의혹에 대해 민주당에서는 "지금은 어떠한 사실도 밝혀진 바 없다(강훈식 수석대변인)", "다른 얘기도 나온다(허윤정 대변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서울 시내 곳곳에 걸린 민주당 현수막 속 '님의 뜻 기억하겠습니다'란 말이 권력형 성범죄 피해로 고통받고 있는 여성들에게 '숨죽여 있으라'라는 겁박처럼 읽힌 이유입니다.
문 대통령이 약속한 '해결 의지'는 권력을 잡은 자기 진영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라는 걸 민주당이 확인해준 셈입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