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회의는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2001~2006) 시절, 관료 주도에서 벗어나 정치 리더십으로 경제정책의 큰 틀을 정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재정건전화 달성을 위한 노력, 각 부처와 국회의원들의 이권(利權) 다툼에서 벗어난 시책 제시로 정책 운영의 선장 역할을 담당했다. 최근에는 선장 역할이 퇴색하고 정부 기관의 예산 획득에 힘을 실어주는 정책 추인 기구로 전락한 느낌이다.
지난 8일 ‘기본방침2020’ 원안이 공표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과 경제 활동의 단계적 확대(제2장), ‘새로운 일상’의 실현(제3장)을 포괄 제목으로 하면서 의료체계 강화, 고용대책, 디지털화 추진 등을 담고 있다. 분량을 작년의 절반 정도인 35쪽으로 줄였다고 하나, 일목요연하게 큰 뼈대가 제시됐다기보다는 아사히신문이 꼬집었듯이 ‘잔 뼈대(骨細·호네보소) 모양새’가 여전하다(지난 11일자 사설). 원안에서 특히 강조하는 디지털화 추진은 아베 정권 초기에도 등장했으나 별반 진행되지 못했다.
원안에서는 ‘디지털 뉴딜’이라는 말을 넣어가며 디지털화 추진을 ‘1번가 1번지’의 최우선 정책 과제라 하고 있다(5쪽). 그 내용을 추려 보면 주민번호(마이 넘버)제도의 개선, 행정 절차의 온라인화, 의무교육 원격 시행, 디지털교재 활용 추진, 서면·날인·대면을 전제로 한 제도 관행 고치기, 의료·개호(노인요양) 데이터 이용 및 온라인화 가속을 들고 있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이제 와서 추진하느냐”고 의아해하겠지만, 일본은 사람 손으로 일일이 확인하고 도장을 찍어 증거 서류를 확보해야 안심하는 아날로그 속성이 강한 사회다.
아날로그식 일처리가 만연한 대표적 집단이 일본 관료사회다. 사례를 들어보자.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일본 정부는 1인당 10만엔의 특별정액급부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인터넷 신청을 받아놓고 오류가 없는지 확인한다며 컴퓨터 화면과 주민표 명부를 일일이 대조하느라 밤샘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신속한 처리는커녕 아직도 지급되지 못한 곳이 수두룩하다. 일은 열심히 하지만 아날로그 사고에 절어 있는 모습이다. 궤도의존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이겠다 싶다. 지내는 데 별 지장이 없을 듯하면 기존 방식을 답습한다.
그렇다고 아날로그식 일처리를 가볍게 볼 것은 아니다. 연속성으로 서로 이어지는 방식이 아날로그고, 유한(有限) 수치로 데이터를 표현하는 방식이 디지털이다. 뇌와 심장을 비롯한 우리의 신체는 아날로그식으로 신호를 주고받는다. 그런 신체 메커니즘인지라 디지털에 심히 경도되면 감정 불안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궤도의존성이 강한 아날로그가 디지털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치부되곤 하지만, 어떤 불안을 조장하는 궤도일탈 디지털 편향도 궁극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아날로그를 무시한 디지털은 절름발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조화가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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