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중국 기업의 미 증시 상장을 쉽게 했던 ‘미·중 회계협정’을 폐기하기로 했다. 중국 기업들이 뉴욕증시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강행 등으로 격화된 미·중 갈등이 한층 심해질 전망이다.
“美 기업 불리해지면 안돼”
키스 크라크 미 국무부 경제차관은 13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중 회계협정 폐기 방침을 밝히며 “조치가 임박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미국 주주들이 위험에 처하도록, 미국 기업이 불리한 처지에 놓이도록, 탁월한 미국 금융시장 표준이 침식되도록 할 수 없다”며 “그렇기 때문에 이는 국가안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미 투자자 보호와 뉴욕증시의 신뢰성 유지 등을 위해 중국 기업의 미 증시 상장을 제한하겠다는 뜻이다.로이터는 복수의 전·현직 당국자 말을 인용해 “백악관이 미·중 회계협정 파기 논의에 관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미·중은 2013년 자국 기업이 상대방 국가 증시에 상장할 때 해당국의 회계기준 적용을 면제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중국 기업은 중국 회계기준만으로 뉴욕증시에 상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판 스타벅스'로 불린 루이싱커피가 회계부정으로 나스닥에서 퇴출되는 등 중국 기업의 회계 투명성이 도마에 오른데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의 회계 협정 파기를 추진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미·중 회계협정은 양국 중 어느 한쪽이라도 폐기 통지를 하면 30일 뒤 종료된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중 회계협정 파기 방침은 중국에 대한 ‘금융 공격’의 연장선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월 11일 미국 최대 퇴직연금인 공무원연금의 중국 주식 투자를 금지했다. 공무원연금이 투자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추진해온 중국 주식 투자를 막아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로부터 사흘 뒤엔 폭스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뉴욕증시에 상장됐지만 미 회계기준을 따르지 않는 중국 기업들을 “열심히 살펴보고 있다”며 제재 조치를 예고했다. 이어 중국이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홍콩보안법을 제정한 5월29일엔 기자회견을 통해 “미 증시에 상장한 중국 기업의 관행을 연구하도록 지시했다”며 한 발 더 나아갔다.
공화당이 장악한 미 상원도 5월 20일 중국 기업을 겨냥해 미 회계기준을 지키지 못하는 외국 기업의 미 증시 상장을 제한하는 ‘외국기업 책임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며 트럼프 행정부에 힘을 실어줬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중 회계협정 움직임이 ‘일회성’ 제재가 아닌 이유다.
미국이 미·중 회계협정을 파기하더라도 알리바바, 바이두 등 현재 뉴욕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이 곧바로 상장폐지되는 건 아니라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하지만 미 회계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만큼 투자자들의 신뢰가 떨어질 수 있다. 2013년 체결한 미·중 회계협정에 따라 그동안 뉴욕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은 미 회계기준을 따르지 않아도 투자자 보호에 필요한 요건을 갖춘 것으로 간주됐지만, 미·중 회계협정이 폐기되면 그런 인식이 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 회계기준을 따르지 않는 중국 기업의 뉴욕증시 신규 상장이 아예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중국 때릴수록 대선 도움된다” 판단
트럼프 행정부가 공무원연금의 중국 주식 투자를 막고 중국 기업의 미 증시 상장을 제한하는 등 금융 공격에 나서는 이유 중 하나는 투자자 보호다. 회계부정으로 나스닥에서 퇴출된 ‘중국판 스타벅스’ 루이싱커피의 사례처럼 불투명한 중국 기업이 뉴욕증시에 상장되면 미 투자자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업들이 미 증시에 상장돼 있으면 뉴욕증시의 신뢰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도 배경이다.‘국가안보’ 논리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와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중국 기업들에 미국 자본이 돈을 대주는 상황을 용납해선 안된다는 주장이다.
올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때리기’가 득표에 유리하다고 보고, 전방위로 더 강력한 대중국 압박조치를 내놓을 가능성도 크다. 스티븐 므누신 미 재무장관은 지난달 11일 홍콩보안법 보복 조치로 “홍콩으로의 미국 자본 이동 제한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 상무부는 홍콩에 대한 수출 특례를 박탈하고 홍콩의 특별지위(무비자·무관세 등)를 없애기 위한 추가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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