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미국의 로펌 ‘크래버스 스웨인 앤드 무어’ 회의실. 촉망받던 8년차 변호사 줄리 스위트는 파트너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진급 관련 회의에 들어간 스위트에게 한 임원이 질문을 던졌다. “여태까지 일하면서 여성으로서 무의식적인 편견을 겪어봤나요?” 대답하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나왔다. 30분 넘게 주체할 수 없는 흐느낌이 멈추질 않았다.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순간이 스쳐갔다.
현재 스위트는 미국 재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꼽힌다. 지난해 9월 세계 최대 컨설팅업체 액센츄어의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뒤 그가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건 기업 조직 내 다양성 강화다. 20여 년 전 로펌 회의실에서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다른 여성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나는 꼭 해낼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계속 도전하자’는 다짐을 했고, 그날은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이후 스위트는 글로벌 기업들의 조직 내 혁신과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인종뿐 아니라 성별에 따른 무의식적 차별을 줄이고 여성 임원을 늘려 양성평등 조직문화를 달성하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현재 42%인 여성 직원 비중을 2025년까지 50%로 높이고 임원진의 여성 비율은 25%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액센츄어의 전 세계 직원은 51만3000명 수준이다. 회사는 재택근무 등 유연근무제를 확대하고 지원 시스템을 강화하며 임금 격차를 해소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리피니티브는 지난해 실시한 조사에서 액센츄어를 다양성 및 포용성 지수가 가장 높은 회사로 선정하기도 했다.
스위트는 미국 기업의 40%가 조직 선진화 계획조차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기업 내 다양성은 사업 성공과 혁신에서 필수적이기 때문에 최우선순위로 다뤄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다양성을 갖춘 조직은 더 많은 고용 등 발전 기회를 갖게 된다”고 역설했다. 얼마 전 낸 보고서에선 워킹맘을 ‘활용도 높은 인적 자원’으로 극찬했다.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워킹맘 직원들이 보유한 모성애는 사회적 욕구라는 모습으로 발현돼 조직에 대한 기여도와 충성도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스위트는 “기업이 워킹맘을 잘 활용하면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너무 빨리 커서 옷을 자주 사야 했는데 늘 돈이 부족했다”며 “바지 한 벌로 버텨야만 했다”고 말했다. 어릴 적 한 가게에서 일하면서 인사 업무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게 됐다. 그는 “안내원을 뽑는 게 내 일이었는데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손해를 메우기 위해 월급 일부를 반납했다”고 회상했다.
변호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클레어몬트 매케나대 시절이었다. 컬럼비아대 로스쿨에서 공부한 뒤 크래버스 스웨인 앤드 무어에 입사했다. 1841년 설립된 이 유서 깊은 로펌에서 역사상 아홉 번째 여성 파트너가 됐다. 금융과 인수합병(M&A), 기업 자문 등의 분야를 거쳤다. 2010년 액센츄어로 이직했으며 성과를 인정받아 5년 만에 북미사업부 CEO로 승진했다. 북미는 전체 매출의 49%를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다. 북미사업부 CEO 당시 고객사를 꾸준히 만나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액센츄어 CEO가 된 건 지난해 9월이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스위트가 액센츄어 CEO로 취임하면서 S&P500 기업 중 여성이 CEO인 기업은 27곳이 됐다”고 보도했다.
스위트는 “많은 근로자가 기업의 디지털화로 일자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한다”며 “CEO가 먼저 대화에 나서 재교육 등 대안을 제시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이어 “액센츄어는 컨설팅을 통해 기업들의 비핵심 업무를 외주화하면서 4만 개의 일자리를 자동화했다”며 “절감한 예산의 60%를 재투자, 재교육 등에 쓰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지난 3년간 30만 명이 넘는 근로자가 재교육을 받았다.
액센츄어 역시 지난 10여 년간 자발적인 혁신에 집중하며 디지털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업무의 99%가 클라우드에서 이뤄지고 있다. 광고대행사인 드로가5 등 기업 인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다양한 역량과 규모도 갖췄다. 1989년 설립된 액센츄어는 120여 개국에서 40여 개 산업에 대한 컨설팅을 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432억달러를 기록했다.
김정은 기자 likesmil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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