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대중(對中) 관세율 상향 조정으로 시작된 미·중 무역갈등은 지난 5월 중국이 홍콩보안법을 밀어붙이자 외교·군사 영역으로 전선을 옮겼다. 그 와중에도 양국 모두 지난해 12월 타결된 미·중 1단계 무역합의는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 기업 화웨이 등에 대한 기술 제재를 빼고는 더 이상의 경제적 압박을 자제하고 있다. 무역 갈등은 오히려 소강 국면이다.
무협지를 읽는 사람은 ‘점도위지(點到爲止)’의 뜻을 안다. 무림 고수들이 우열을 다툴 때, 급소를 건드림으로써 서열을 정하되 치명적 공격은 피하는 일종의 공존법이다. 중국 경제의 급소를 몇 번 짚어 농산물 수입 확대 등의 양보를 얻은 다음, 미국은 외교 안보 영역에 공세를 집중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중국에 치명상을 입히면 미국도 다친다는 판단에서다.
무역 갈등에서 시작했지만, 시장과 공급사슬로 연결돼 서로 의존하는 까닭에 양국이 끝까지 상대의 급소를 겨냥해 밀어붙이기는 어렵다. 세계적 유동성 장세에서 미국 주식시장은 아직 호황이나, 100일도 남지 않은 대선을 위해서라도 실물경제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미·중 경제관계의 파국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양국 모두 국내 정치용으로는 미·중 갈등이 여전히 유용하고 매력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대응 실패에 따른 여론 악화를 되돌리기 위해 미국 우선주의와 미국의 힘을 앞세워 ‘샤이(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지지자) 트럼프’ 표심 잡기에 급급하다. 개인 성향이나 역량의 치부를 드러낸 주변 인물들의 연이은 서적 출판도 그의 초조한 마음을 부추겼다. 보편 가치를 앞세웠던 미국의 세계전략과 트럼프의 개인적 이해는 상충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모호한 현상유지 정책으로 북한을 묶어두고, 미·중 갈등 과정에서 미국의 힘을 과시해 대선을 유리하게 이끈다는 심산이다.
중국도 국내 정치가 우선이다. 2018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주석 임기 제한을 철폐한 중국은 시진핑의 권력 강화를 위해 ‘중국식 사회주의’와 ‘신형대국’의 완성을 이념화했다. 사회통제 강화와 홍콩 ‘일국양제’의 훼손, 개인숭배 분위기 띄우기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미국과의 대립 국면은 중국인의 애국심 및 민족 자존심을 고양함으로써 코로나19의 충격과 경기 침체, 중국 남부 지방을 휩쓸고 있는 대규모 수해로 인해 고조된 사회 불만을 관리하기에 유용하다. 경제 악화도 적당히 미국 탓으로 돌릴 수 있다. 미·중 갈등 장기화로 인한 경제 손실을 감내하고라도 ‘미국과 대적하는 중국’ 이미지를 연출해 시진핑의 입지를 강화하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미·중이 무역합의 이행을 다짐해 경제 파국을 피하면서도, 국내 정치적 동기에 의해 갈등 구조를 활용한다면, 한반도 정세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11월 대선에 대비한 실적을 쌓기 위해 한국의 주한 미군 주둔 비용 부담 증액과 ‘말썽 부리지 않는 북한’을 원한다. 중국은 미국과의 갈등 대응 수단으로 북한 카드를 활용한다. 대북제재 국면에서도 북·중 국경 지역의 ‘회색지대’를 통해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는 북한 핵을 묵시적으로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남북관계 개선의 여지가 사라짐은 물론이다. 한국은 미·중 갈등 여파로 사실상 핵무기를 가진 북한을 상대해야 하고, 전략 입지가 취약해지는 상황에 처했다. 미·중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충격보다 한반도 정세 악화를 우려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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