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에 소비도 투자도 안해…'슈퍼세이버'가 장기 침체 부른다

입력 2020-07-27 17:12   수정 2020-07-28 01:19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소비·투자를 줄이고 현금을 쌓는 ‘슈퍼세이버’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슈퍼세이버가 속출하면서 경기 하강 속도가 빨라지고 침체의 골이 깊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최근 “소비와 투자의 회복을 더디게 한다”며 슈퍼세이버의 등장을 걱정했다.
금고·장롱 속 5만원권 ‘115兆’
27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국내 은행의 총예금 잔액은 작년 말에 비해 5.8%(87조9402억원) 늘어난 1603조4597억원에 달했다. 사상 처음 1600조원을 돌파했다. 1년 전 대비 증가율은 12.1%로 2011년 3월(12.3%) 후 가장 높았다. 가계·기업이 보유한 예금 등 현금성 자산의 증가 속도가 그만큼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통장 잔액 대비 인출금 비율을 나타내는 은행의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올해 5월 15.6회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가계·기업의 현금 보유 성향이 강해지면서 돈이 생산·투자 활동에 쓰이지 못하고 통장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현금을 축적하는 슈퍼세이버가 늘고 있다는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된다. 5만원권을 비롯한 지폐 선호도가 올라간 것도 그중 하나다. 6월 말 5만원권 화폐발행잔액은 114조7695억원으로 사상 최대 수준으로 불어났다. 화폐발행잔액은 한은이 시중에 공급한 화폐에서 한은 금고로 돌아온 돈을 뺀 수치로 시중에 남아 있는 돈이다.

정부와 한은은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만 각종 정책금융을 통해 시중에 120조원이 넘는 유동성을 공급했다. 한은은 기준금리도 연 1.25%에서 사상 최저인 연 0.5%로 끌어 내렸다. 모두 시중에 돈을 풀어 소비와 투자를 늘리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슈퍼세이버가 증가하면서 정책 효과가 반감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총재는 지난달 25일 열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극단적 위험회피 성향의 슈퍼세이버가 증가하고 있다”며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소비 및 투자의 회복이 더뎌지고 물가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소비·투자 위축으로 올해 2분기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3.3%로 주저앉았다. 분기 기준으로 외환위기 때인 1998년 1분기(-6.8%) 후 최악 수준으로 떨어졌다.
코로나에 위축된 가계·기업
슈퍼세이버의 등장은 코로나19로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진 결과란 분석이 많다. 소비 및 투자 심리가 얼어붙으면서 가계와 기업이 현금을 장롱과 금고에 쌓아 놓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은이 발표한 6월 소비자심리지수는 81.8이었다. 장기평균치(2003~2019년)인 100을 크게 밑도는 것은 물론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8월(90.6)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최저임금 등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도 일정 정도 영향을 줬다는 관측도 있다. 지난 5월 한국의 경제정책 불확실성(EPU) 지수는 428.82로 1990년 통계를 작성한 이후 두 번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스콧 베이커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 등이 개발한 이 지수는 기준치인 100보다 높으면 불확실성 확대, 낮으면 축소를 뜻한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가계와 기업이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현금을 쌓아두는 현상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라며 “안전자산 수요가 증가하며 현금처럼 안전하다고 인식되는 부동산에도 현금이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슈퍼세이버(super saver)
위험회피 성향이 커지면서 투자·소비를 줄이고 현금을 쌓는 가계·기업을 말한다. 이들의 행태가 투자·소비를 감소시켜 잠재성장률 훼손과 물가 하락 등을 부추길 수 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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