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층 천장에서 늘어뜨린 쇠막대에 매달린 빨간색 바퀴들이 돌아간다. 자전거 체인으로 연결된 바퀴의 높이는 제각각이다. 벽면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외발자전거의 바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움직이는 사람들 같다.
27일 문을 연 부산 해운대 영무파라드호텔 1층의 거대한 보이드(void) 공간에 들어선 설치미술가 손봉채 씨(53)의 키네틱아트(움직이는 조각) ‘시간여행’이다. 손씨는 “여행을 테마로 오고 가는 사람들을 자전거로 표현했다”며 “움직이는 조각뿐만 아니라 벽에 비친 그림자의 움직임은 더욱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트호텔’을 표방하는 영무파라드호텔은 이렇게 외부에서 주로 볼 수 있었던 키네틱아트, 그라피티 등의 미술작품을 실내로 끌어들였다. 호텔 내부의 4~15층을 4개 층씩 나눠 확보한 보이드 공간 벽에는 그라피티 작품을 입혔다. 높이 11m, 너비 16m의 거대한 벽은 크기만으로도 압도적이다. 벽을 따라 객실 복도가 연결돼 있어 각 층 어디서나 그림을 볼 수 있다.
4~7층 벽에는 첨단 빌딩, 가파른 골목 계단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옛날 집들, 등대 등 여러 요소가 혼재된 부산의 특징을 통통배 위에 얹어놓은 부산 대표 작가 구헌주의 그라피티 ‘부산호-움직이는 섬’이 그려졌다. 8~11층 벽에는 국내 1세대 그라피티 아티스트로 꼽히는 제이플로우(임동주)가 화려한 색감의 ‘산책(Taking a Walk in Busan)’을 선보였다. 의인화한 상어 캐릭터로 유명한 제이플로는 이번에도 상어 마스크의 인물이 반려견을 데리고 유쾌하게 산책하는 모습을 담아냈다.
12~15층 벽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녀가 등장한다. 금실로 수놓은 문양이 화려한 붉은 치마에 색동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색동신발을 신으려고 왼발을 살짝 들어 올렸다. 살포시 눈을 깔고 두 손으로 치마폭을 조심스레 들어 올린 채 신발이 어디 있나 찾는 모습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귀엽다. 한복을 입은 미셸 오바마를 그린 그라피티로 널리 알려진 로얄독(RoyyalDog·심찬양)의 작품 ‘Walk in your shoes’다. 당연히 한복 입은 소녀도 여덟 살짜리 흑인소녀 ‘벨라’다. 인종차별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는 흑인들을 향한 연대의 표시인데, 한복의 디테일을 한껏 살린 사실주의 회화 기법의 그라피티여서 더욱 눈길을 끈다.
이뿐만 아니다. 영무파라드호텔은 전체가 전시장이라고 할 만큼 곳곳에 300여 점의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주변과 복도, 객실에는 김기창, 제프 쿤스 등 대가들과 영호남 신진 작가들까지 다양한 작가의 회화, 조각 등이 걸렸거나 놓여 있다. 복도를 비롯한 공용 공간에 전시되는 작품만 약 70점이다. 26층의 레스토랑 ‘오스테리아 씨엘로’에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프린트 작품과 에바 알머슨의 대형 회화도 걸어놓았다.
특히 258개의 객실은 33점의 작품을 건 대구 계명대 강민정 교수와 학생들을 비롯해 영호남 신진 작가들의 전시 공간이다. 또 25층 스위트룸을 ‘작가의 방’으로 정해 젊은 작가 3명이 방 전체를 몽글몽글한 느낌의 하늘 풍경과 분홍색 그림으로 장식했다.
지하 2층에는 두 개의 전시 공간을 마련해 29일 ‘피카 프로젝트-깔롱 드 팝아트’전과 ‘푸룻푸룻 아일랜드-FOREVER SUMMER’전을 개막한다. ‘깔롱 드 팝 아트’전은 앤디 워홀을 비롯해 장 샤를 드 카스텔바작, 장 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 케니 샤프 등 팝아트 거장들의 원화 작품 20여 점과 관련 영상을 보여준다. 전시명의 ‘깔롱’은 ‘멋지게, 폼나게’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다. 푸룻푸룻 아일랜드는 과일을 주제로 한 신개념 예술 놀이터로,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초청 작가인 도로시엠윤 등 8명의 작가가 꾸민 체험형 비주얼아트 전시다.
영무파라드호텔의 시공 및 운영사인 영무토건은 ‘영무예다음’이라는 브랜드로 광주, 서울, 대구 등에 2만여 호의 주택을 공급한 중견 건설회사다. 평창 라마다호텔, 여수 베네치아호텔도 시공했다. 박헌택 영무파라드호텔·영무토건 대표는 미술품 컬렉터이자 예술후원자다. 광주에서는 대인동의 퇴락한 내과 건물을 갤러리, 공연장, 카페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 ‘김냇과’로 탈바꿈시켜 젊은 작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후원하고 있다.
“쉬는 것도 예술”이라며 아트호텔 실험을 시작한 그는 “예술 작품을 보러 전국에서 우리 호텔을 찾아오게 하는 게 꿈”이라며 “지방의 청년 작가들 중에서 미래의 김환기와 피카소가 나올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힘을 보태겠다”고 강조했다.
부산=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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