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엔화는 디지털 위안화와 마찬가지로 가상화폐가 갖고 있는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성공 확률이 높게 점쳐진다. 디지털 통화는 실물 화폐와 달리 자체적으로 가치가 없기 때문에 발행기관과 법정화 여부가 중요하다. 디지털 엔화는 일본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디지털 법정통화(CBDC)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현재 통용되는 엔화와 디지털 엔화를 1 대 1로 교환해 구권을 신권으로 교체할 때 단행하는 ‘리디노미네이션(화폐거래 단위 축소)’ 우려도 불식했다. 일본은행이 발행한 디지털 엔화를 은행에 넣어둔 예금만큼 금융 소비자(고객)의 전자수첩에 넣어줘 사용토록 하는 결제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 중앙은행도 디지털 통화 도입을 앞당기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세계 각국 중앙은행의 80%가 도입을 전제로 디지털 통화 연구를 완료한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통화 전쟁에 동참하지 못할 경우 2차대전 이후 브레턴우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부담해온 과다 달러 보유, 즉 ‘달러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뒤늦게 비상이 걸린 국가가 미국이다. 기업 권력이 국가 권력까지 넘보는 것을 견제할 목적으로 페이스북의 리브라 발행을 불허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방침에 따라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미국 중앙은행(Fed)이 조만간 디지털 달러 도입 방침을 밝힐 예정이다. 기축통화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믿을 것은 기축통화밖에 없다”는 예상과 달리 달러 가치가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Fed가 코로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최종 대부자 역할(lender of last resort)을 포기했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달러화를 무제한으로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화 공급이 많으면 가장 우려되는 것이 ‘트리핀 딜레마’를 극복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트리핀 딜레마란 미국은 경상수지 적자 등을 통해 달러화를 계속 공급해야 하지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대외 신뢰도가 떨어져 기축통화국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벨기에 경제학자인 로버트 트리핀의 주장이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는 또 다른 요인으로 코로나 사태 이후 세계화 퇴조로 달러화 필요성이 줄어드는 대신 언택트(비대면) 시대가 앞당겨지는 상황에서 디지털 달러 도입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란 점을 지적하는 시각이 의외로 많다. 달러 과다 공급보다 이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면 달러 약세 추세는 상당 기간 지속된다는 얘기다.
디지털 통화 시대가 앞당겨짐에 따라 각국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의 목표와 수단 등에서 근본적이고 새로운 고민을 떠안게 됐다. 분명한 것은 네트워킹 효과와 수확 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디지털 통화 시대에는 각국 중앙은행이 전통적 목표인 ‘물가 안정’에만 주안점을 둘 수 없다는 점이다.
통화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다른 경제주체도 공유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정보의 비대칭성’을 전제로 한 중앙은행의 시장 주도 기능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중앙은행과 시장 참여자 간 관계가 ‘수직적’이 아니라 ‘동반자적’으로 변한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의 위상, 금융시장 효율성 지표인 기준금리와 시장금리 간 체계가 약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각국 국민이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새로움과 복잡성’에 따른 위험이 증대되고 화폐개혁 논의도 제기된다. 유사 금융행위와 금융사고도 판친다. 이런 환경에 맞춰 금융감독이 새로운 방식, 이를테면 옴니버스 방식 등으로 접근하지 못하면 각국 국민의 화폐생활에서 혼란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도 화폐개혁 논쟁이 국민의 저항이 큰 ‘리디노미네이션’보다 ‘디지털 원화’를 도입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디지털 원화’를 발행할 것인가를 시작으로 중앙은행 목표 수정, 디지털 통화지표 개발, 통화정책 전달경로 유효성 점검, 경기 예측력 제고 등의 과제에 서둘러 대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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