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를 초토화시킨 베이루트 항구 폭발 참사를 두고 레바논 정부 고위급 인사들이 폭발 원인으로 지목된 질산암모늄이 시내에 대량 적재돼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수년간 방치했다는 보도가 나와 레바논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레바논 세관이 폭발 위험성에 대해 수차례 경고했지만 레바논 고위 공무원들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5일(현지시간) 알자지라는 관련 서류를 근거로 "레바논 고위 관리들은 6년 넘게 베이루트 항구의 한 구역에 질산암모늄이 수천톤 보관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며 "그러나 그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번에 폭발 참사를 일으킨 질산암모늄은 원래는 레바논에 도착할 화물도 아니었다. 2013년 9월 러시아 기업이 소유한 화물선이 조지아에서 모잠비크로 질산암모늄을 싣고 가던 중 고장나 베이루트 항구에 정박했다. 그러나 이후 레바논 당국자들이 선박 출항 승인을 내주지 않자 선주와 선원이 배를 포기했다.
레바논 세관은 2014년 배에 있던 질산암모늄을 베이루트 항구의 한 창고에 하역했다. 항구 인근을 지나는 주요 고속도로와 마주보고 있는 커다란 창고였다.
세관은 이후 레바논 사법부에 질산암모늄 처리 방안을 마련해달라고 최소 여섯 차례 공문을 보냈다. 2016년엔 "(질산암모늄을) 부적합한 기후 조건에서 창고에 보관하는 것은 심각한 위험"이라며 "베이루트 항구 일대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 물품을 재수출하거나, 레바논 내 민간 화약기업 등에 판매한다는 안에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2017년에는 세관이 아예 판사에게 결정을 내려달라고 간청했다. 이같은 요청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번번이 묵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데일리메일은 "입수한 세관의 공문 내용을 보면 세관은 시간이 갈 수록 점점 긴박한 문구로 유해 화학물질 위험성을 경고했다"며 "그러나 공무원들은 명백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아예 답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레바논에선 최근 부쩍 고위 공무원 등의 부패와 결탁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폭발 사고 전날엔 나시프 히티 레바논 전 외무장관이 임명 7개월만에 사직했다.
히티 전 장관은 사직서에서 "나는 국가만 섬기려 했는데 실제로는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많은 이들을 섬겨야 했다"며 "이들이 국민을 위해 지금이라도 합심하지 않는다면 이 배(레바논)는 가라앉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레바논 당국은 이번 폭발 사고로 최소 100명이 숨지고 4000여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부상자 중 수십명은 중태 환자다. 구조요원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를 수색하면서 사망자와 부상자 수가 각각 빠르게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루트 당국은 이번 폭발로 25만명 가량이 집을 잃었고, 재산 피해 규모는 50억달러(약 5조9400억원) 이상일 것으로 보고 있다.
알자지라는 "이번 참사는 레바논에 만연한 정부와 공무원 부패로 인해 일어난 '인재'"라며 "레바논 국민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한 공무원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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