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오해가 풀려 1944년 8월 준장이 됐고 석 달 뒤 소장, 4년 뒤 중장으로 진급했다. 1951년 미8군 사령관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그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포탄을 5배 퍼붓는 ‘밴 플리트 포격’으로 전황을 뒤집었다. 그 공으로 대장이 된 뒤 전선을 평양~원산까지 밀어붙이려다 휴전을 준비 중인 행정부에 밀려 뜻을 접어야 했다.
당시 그는 “이번에 공산주의자들이 대가를 치르지 않고 휴전에 성공하면 민주국가들, 특히 미국은 수세기 동안 악몽에 시달릴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 와중에 외아들까지 잃었다. 신혼의 단꿈을 뒤로 하고 아버지를 따라 참전한 아들은 B-26폭격기로 야간 공습에 나섰다가 추락했다.
밴 플리트는 그 슬픔을 딛고 한국 육군사관학교를 4년제로 재편해 군 정예화에 힘썼다. 한국군 조직도 10개 사단에서 20개 사단으로 늘려 현대화했다.
휴전 이후 전역한 그는 양국 협력을 위한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창설해 한국 재건에 앞장섰다. 1992년 100세로 별세하기 두 달 전, 그는 한국 육사 생도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일깨웠다.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은 그 꿈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자유란 소중하면서도 소멸되기 쉬운 것입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국민은 그들의 ‘자유’를 수호할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군대가 필요하며 그 군대는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하고 전문성과 모범은 시민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그의 뜻을 기리는 ‘밴 플리트 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그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등에 이어 올해는 한국전 참전용사협회, 대한상공회의소, 방탄소년단(BTS)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방탄소년단은 오는 10월 7일 시상식에서 온라인 갈라쇼를 선보일 예정이다. ‘늦깎이 스타’ 밴 플리트가 살아 있다면 자랑스런 ‘자유의 후손’인 한국 꽃미남들과 함께 어깨춤이라도 출 듯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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