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없는 날'. 지난 14일은 국내에 택배가 도입된 지 28년 만의 첫 공식 휴일이었다. 택배 기사들에게도 처음 제대로 된 휴가가 주어졌다. CJ대한통운 롯데택배 한진택배 로젠택배 등 업계 점유율의 약 80%를 차지하는 4개 택배사가 이날 하루를 '택배인 리프레시 데이'로 지정하고 택배 배송 업무를 중단하면서다.
택배 업무가 중단되기 전인 11일 기자는 온라인 쇼핑을 했다. 평소 마시던 캔음료부터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훨씬 싼 생활소품까지 다양한 물건을 샀다. 각 상품 판매 페이지는 '택배 없는 날' 전에 물건을 받으려면 언제까지 주문 완료해야 하는지 공지를 띄워놓았다.
업체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늦게까지 주문을 받는 곳은 '택배 없는 날' 전날인 13일 오후 4시까지, 일찍 마감하는 곳은 13일 오전까지 주문을 완료할 것을 권장했다. 11일에서 12일로 넘어가는 새벽시간에 온라인 쇼핑을 한 기자는 꽤 '느긋하게' 쇼핑을 마무리한 셈이었다.
12일이 되니 물건이 택배사로 전달됐다는 알림 메시지가 울리기 시작했다. 문득 '나만 해도 물건을 8개나 샀는데 물량이 엄청 많겠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택배 물량이 밀려 14일 이전에 물건을 못 받는 건 아닐까, 택배 기사들은 괜찮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택배 기사는 쏟아지는 물량에도 평소와 같이 자기 몫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14일 '첫 휴가'를 떠난 셈이다.
일반 직장인들이 휴가나 연휴 전후에 업무량이 늘어나는 것처럼 택배 노동자도 사정은 비슷하다. 온라인쇼핑몰 G마켓에 따르면 지난 10~11일 화장지, 물티슈, 기저귀 등 생필품 판매량은 전주 같은 기간보다 40% 뛰었다. 위메프에서도 10~12일 물티슈 58.3%, 여성용품은 75.9%, 기저귀 60.3%씩 판매량이 늘었다.
그만큼 택배 기사들은 '택배 없는 날'을 앞둔 13일까지 더 많은 땀을 흘렸을 것이다. 연휴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택배 없는 날'에 이어 주말까지 들어온 물량까지 처리하면 택배 기사들 업무 강도는 평소보다 세진다. 우정사업본부와 다소 차이는 있지만 택배사들은 임시공휴일인 17일부터, 또는 18일부터 업무를 재개한다.
김세규 택배연대노조 교육선전국장은 <한경닷컴>과의 통화에서 "연휴 전후로 물량이 늘어나는 건 당연하지만 휴가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택배 노동자 대부분이 연휴 때 여행계획을 세우고 있다"면서 "가족이 지방에 있는 기사들은 오랜만에 방문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오려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김 국장은 "택배 기사는 '특수고용 노동자'다 보니 1년 365일 휴가가 단 하루도 없다. 이번 '택배 없는 날'을 계기로 택배 노동자에게 휴식을 줘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만들어져 의미 있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17일 임시공휴일에 쉬지 못하는 건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14일 하루라도 쉴 수 있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덧붙였다.
택배 기사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닌 개인사업자 신분으로 돼 있는 특수고용 노동자라 연차나 병가를 낼 수 없다. 질병, 경조사 등의 이유로 쉬어야 하는 경우엔 자신의 물량을 대신 처리해줄 사람을 직접 구해야 한다. 이를 업계 용어로 '용차'라 한다. 택배 노동자는 평소 받는 건당 수수료의 2배 정도를 용차 기사에게 지불해야 한다.
몸은 쉬었지만 금전적으로는 오히려 손해를 보는 구조다. 이번 '택배 없는 날'에는 '용차'를 구할 필요도 없어 택배 노동자들은 마음놓고 쉴 수 있었다.
기자의 집에 택배 물품 7개 배달을 마친 택배 기사는 어떤 휴가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약간의 민망함을 무릅쓰고 택배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사는 평소보다 택배 물량이 많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택배 없는 날' 고려해 미리 주문을 많이 하셨나 생각했다. 잘하셨다"라고 말했다.
연휴 계획을 묻자 택배 기사는 "가족들과 강원도에 다녀올 예정이다. 다행히 장마도 끝나 즐겁게 쉬다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월요일에 업무 복귀하면 택배 상자가 쌓여있겠지만 그 고민은 연휴가 끝나면 할 생각"이라며 들뜬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올 5월 과로사로 유명을 달리한 택배 노동자 정상원 씨의 아내 서한미 씨는 이달 11일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 마련 촉구 유가족 공동 기자회견'에서 "8년 만에 여행 간다며 좋아하던 아이 아빠를 아침에 깨웠는데 숨져 있었다"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전화기 너머 들린 택배 기사의 들뜬 목소리는 평소 그의 삶이 고단했음을 방증하는 것 아니었을까.
특히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언택트(비대면) 거래가 급증하면서 택배 노동자 근무 강도 역시 크게 높아졌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이 지난 12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택배업 산업재해 현황'에 따르면 올 상반기(1~6월) 업무상 사망한 택배 노동자는 9명, 이 중 7명이 과로에 따른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숨졌다.
공식 통계상 택배 노동자 과로사는 최근 연간 3~4명 수준이었으나 올해는 상반기에만 이미 이 수치를 넘어섰다.
주5일 근무가 일상이 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매일 현관문 앞에 택배 상자를 놓고 가는 택배 노동자들의 삶에는 여전히 '주5일 근무'가 자리 잡지 못했다. 거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우선 매년 '택배 없는 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이미경 한경닷컴 기자 capita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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