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나실인과 극작가 윤미현은 최근 한국 오페라계에서 주목받는 창작 콤비다. 지난해 처음 합작한 라벨라오페라단의 창작 오페라 ‘검은 리코더’에서 노인 고독사의 문제를 오페라 문법에 절묘하게 녹여내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어 국립극장 창설 70주년 기념작품인 국립오페라단의 ‘빨간 바지’와 서울 예술의전당이 제작한 ‘춘향 2020’을 함께 창작했다. ‘빨간 바지’는 오는 28~29일 서울 장충동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르고, ‘춘향 2020’은 29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한다. ‘빨간 바지’ 막바지 연습이 한창인 서울 충무아트센터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인간의 욕망을 부동산을 소재로 드러내고 싶었어요. 평범하지만 윤택한 삶에 대한 욕구요. 관객들이 공연을 보며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봤으면 좋겠습니다.”(윤미현)
‘빨간 바지’는 1970년대 강남 개발이 한창일 때 부동산 투기에 목을 맨 인간 군상을 3막 오페라극으로 그려낸다. 공연 제목인 ‘빨간 바지’는 강남 일대를 휘젓던 복부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의 ‘부동산 바람’을 겨냥해 만든 건 아니다. 이 작품은 지난 3월 공연 예정이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연기됐다. 대본 초고는 지난해 여름, 악보 초본도 지난 1월쯤 완성됐다고 했다. “3년 전 구상했던 작품입니다. 국립오페라단에 작품을 위촉받은 후 윤 작가에게 바로 연락했죠,”(나실인) “어릴 때부터 집에 관심이 많았어요. 중학생 때는 ‘복부인이 되고 싶어라’는 시도 써낸걸요. 이전에 도시 재개발과 관련한 희곡을 많이 써서 이번에 오페라 대본을 쓸 때도 그리 힘들진 않았어요,”(윤미현)
이 작품에선 부동산계 전설로 알려진 복부인 진화숙과 그를 추종하는 인물이 주요 배역으로 나온다. ‘제2의 진화숙’을 꿈꾸는 목수정이 이들과 얽히는 게 주요 내용이다. 얼핏 들으면 연극에 어울리는 이야기다. 두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연극과 달리 오페라는 아리아를 통해 감정과 분위기를 전할 수 있죠. 연극 대본으로 A4용지 한쪽 분량의 대사를 3분짜리 노래로 줄일 수 있습니다. 아리아에 무용도 함께 곁들여 오페라가 낯선 관객들도 쉽게 몰입할 수 있게 했습니다.”(나실인)
무거운 주제와 달리 배경 음악은 경쾌한 선율로 작곡했다. 희극적인 분위기와 서정적인 대사가 장마다 엮인다. “블랙 코미디죠. 그런데 희극 오페라는 아닙니다. 성악가들의 연기는 비극적이지만 상황은 해학적이죠.”(나실인)
이번 작품에서 관객들이 공감할 만한 아리아로 나 작곡가는 극 중 최 기사가 부르는 ‘쌍라이트’를, 윤 작가는 여성 성악가들의 3중창 ‘빨간 바지로 농사를 짓는’을 꼽았다. “쌍라이트에 나오는 ‘이 길 달리다 보면 아파트 전구 가는 흰 메리야쓰 입은 아저씨가 되겠지~’란 가사에 많은 남성들이 공감할 겁니다.”(나실인) “3중창 가사에 ‘빨간 바지로 서울에서 농사 짓는 우리는 도시의 화전민’이란 가사가 나와요. 지금 시점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 같아요.”(윤미현)
두 사람은 1970년대 시대상을 무대에서 재현하려 했다. 등장인물이 지닌 성격을 상징하는 소재 하나하나에 공을 들였다고 했다. 1970년 처음 나온 ‘부라보콘’으로 주인공의 모성애를 보여주는 식이다.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1970년대 생활문화사》란 책을 수없이 읽었죠. 그렇게 해서 ‘곰표 밀가루’ ‘도나쓰 비스켓’이란 단어를 대본에 넣었습니다. 소재로 쓴 아이스크림도 제대로 알아보려고 빙과류 연대기를 다 훑어본걸요. 하하.”(윤미현)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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