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의 숫자를 쫓아가면 이건희 삼성 회장을 마주하게 된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 본격 진출을 선언한 ‘도쿄 선언’(1983년 3월) 이후 약 10년간은 고난의 시기였다. 1987년 누적 적자에 지친 참모들이 사업 철수를 제안했지만 이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반도체 불황에 일본 경쟁사들은 투자를 축소했지만 이 회장은 기회를 포착했다. D램 신규 라인 건설에 1991년 4500억원, 1992년엔 8000억원을 쏟아부었다. 기적처럼 업황이 살아났고 1993년 일본 업체들을 제치고 D램 세계 1위에 올랐다. ‘세계 1위의 전설’은 총수의 결단으로 만들어졌다.
27년 231일이 지나는 동안 삼성전자를 둘러싼 경영 환경은 더욱 냉혹해졌다. 세계 1위 D램과 낸드플래시, 스마트폰, TV, 생활가전 등에선 경쟁업체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5세대(5G) 통신장비, 바이오 사업에선 TSMC, 퀄컴, 화웨이 등의 벽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이를 진두지휘하는 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이 부회장은 올 들어 경기 평택 EUV(극자외선) 파운드리 라인 투자(10조원), 낸드플래시 라인 신설(9조원), 삼성바이오로직스 4공장 신축(1조7400억원) 등을 결정했다. “메가 트렌드를 읽고 한발 앞서 대규모 투자를 결단하는 게 삼성그룹 총수의 리더십”이란 삼성전자 전문경영인들의 얘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1분 1초가 아까운 이 부회장의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게 검찰이다. 지난 6월 26일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가 이 부회장의 불법 경영승계 의혹과 관련해 ‘불기소’ 의견을 전달했음에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수사팀은 55일째 묵묵부답이다. 수사심의위 13명 중 10명이 경영 승계 과정에서 불법이 없다고 봤지만 수사팀은 여전히 좌고우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이 삼성은 ‘희망고문’에 지쳐가고 있다. 산적한 현안을 쌓아둔 채 삼성 고위 경영진은 서울 서초동만 쳐다보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무죄’를 말하는 상황에서 검찰이 ‘기소’를 강행했을 때 삼성과 한국 경제에 미칠 후폭풍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법조계 안팎에선 이 부회장에 대한 ‘기소유예’가 많이 거론된다고 한다. 명예를 지키며 후퇴할 수 있는 길을 수사팀이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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