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예정대로 한건데"…일본 정부의 이상한 '정신승리'

입력 2020-08-20 09:55   수정 2020-08-20 10:01



지난 19일 일본 경제산업성이 보도자료 하나를 냈다. 한국이 일본산 공기압 전송용 밸브에 높은 관세를 매기던 조치를 이날 0시를 기해 그만두자, 이를 두고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에서 이긴 덕분”이라고 자화자찬하는 내용이었다. 산케이신문과 교도통신 등은 이 자료를 기반으로 “한국이 WTO 분쟁에서 일본에 진 뒤 관련 관세를 철폐했고, 이는 일본 정부의 성과”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이런 설명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는 게 산업통상자원부의 설명이다. 오히려 진실은 정 반대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온다. WTO 분쟁에서 패배한 일본 정부가 '정신 승리'할 빌미를 찾다가 한국 정부의 예정된 조치를 두고 '이겼다'는 식의 설명을 냈다는 것이다.
공기압 밸브가 뭐길래
이를 이해하려면 공기압 전송용 밸브가 무엇이고, 이를 둘러싼 한·일 분쟁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알아야 한다. 한국은 2015년 일본산 공기압 전송용 밸브가 지나치게 싼 가격에 판매돼 국내 산업경쟁력을 해친다는 이유로 11.66~22.77%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

공기압 전송용 밸브는 압축공기를 전송해 기계 운동에 관여하는 부품이다. 자동차와 일반 기계, 전자 제품 등에 사용된다. 당시 해당 부품의 국내 시장에서 일본산 비중은 70%가 넘었다. 고율 관세를 부담하게 된 일본은 관세부과 조치를 두고 2016년 "WTO 협정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며 WTO에 제소했다.

WTO는 지난해 9월 사실상 한국의 손을 들어줬다. 판정 결론은 "한국의 세금 부과를 철폐할 필요는 없으나 일부 문제점이 있으니 이걸 시정해 다시 부과하라"는 말로 요약된다. 어떤 부분에서는 이기고 어떤 쟁점에서는 졌지만, 관세 자체를 철폐하라는 요구가 없었던 만큼 한국의 승리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다만 한국은 물론 일본까지도 "우리가 이겼다"고 결과를 홍보했다. WTO에는 이 같은 분쟁이 자주 제기되는데, 일방적인 승리나 패배로 결론나는 일은 드물다. 이처럼 '부분 승소·패소' 결론이 나면 해당 국가는 서로 "이겼다"고 발표하고, 미·중 무역분쟁에서도 양국 상무부는 늘 이런 식으로 공표를 해왔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일본 정부, 어이없는 '정신승리'
그 후 1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한국 정부는 WTO가 지적한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해 모두 이행했다. 이에 따라 일본산 공기압밸브에 고율 관세를 매기는 조치도 이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정당하게' 유지됐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고율 관세 조치가 자체적으로 종료(일몰)될 시점이 다가왔다. WTO 협정과 국내 관세법에 따르면 일반적인 덤핑방지관세 부과 조치는 원칙적으로 5년 단위로 부과할 수 있다. 이에 따라 2015년 8월 19일부터 매기기 시작한 이 관세도 지난 19일 0시부로 '자동 폐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동 폐지 조치가 이뤄진 날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우리가 WTO에서 이겼기 때문에 한국 정부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관세를 폐지한 것"이라는 식의 보도자료를 냈다. WTO 분쟁에서 사실상 졌는데도, 전혀 관계 없는 한국 정부의 자동적인 조치를 두고 '우리가 이긴 증거'라고 주장한 것이다.

산업부는 이날 설명자료를 내고 "일본측 주장과 달리 우리가 WTO에서 이긴 데다, WTO가 일본 주장을 받아들인 부분에 대해서는 성실히 이행을 완료하고 일본과 WTO에 통보했다"며 "반덤핑 조치 종료는 부과기간 경과에 따른 것으로 국내 생산자가 재심 요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통상전문가는 “통상 관련 사안을 자국에 유리하게 설명하는 건 일반적인 일이지만 이번엔 일본 정부가 좀 무리한 것 같다”며 "이런 '무리수'를 둔 배경에는 어수선한 일본 내 분위기도 반영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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