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평생 100여 권의 책을 냈다. 그가 첫 번째로 낸 책은 피란 시절 졸업을 앞둔 대학생 신분으로 대구에서 출판한 《종합국문연구》라는 책이다. 당시 배고픔과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해 문경의 한 고등학교 임시 영어 선생을 했던 이 전 장관은 선진문화사라는 대구의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는 과정에서 향촌동의 다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문인들과 어울렸던 기억을 최근 대구문학관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이 전 장관은 “일제 강점 하에서도 대구는 이육사, 이상화 같은 시인들이 끝없이 저항하면서 문화의 등불을 끄지 않았던 등잔 속 심지 같은 도시였고 6·25 때도 대구는 살기 위해 먹을 것을 구하는 생존만을 위한 피란의 도시가 아니라 암울함 속에서도 문화를 지켜왔던 곳”이라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이 전 장관은 “당시 문인들은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거나 문단활동을 인정받기 위해 활동한 것이 아니었다”며 “시와 소설 그림과 음악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었던 시대, 문화예술은 영성의 밥이었다”고 말했다.
70년이 지난 올해 대구는 코로나19가 집단 발병하면서 사상 초유의 위기를 겪었다. 대구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아직까지 코로나19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총칼이 아닌 바이러스와의 전쟁 속에서 인간의 경제 사회 문화 활동이 모두 위축됐다. 하지만 대구에서는 문화예술인들의 활발한 활동이 일제강점기와 6·25 때부터 이어온 대구정신으로 다시 살아올라 위기극복의 힘이 되고 있다.
대구시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대구예술 희망프로젝트를 추진해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의욕을 고취하고 있다. 채홍호 대구시 행정부시장은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활동 고취를 위해 하반기 공연의 경우 국내외 예술인 초청 범위를 대폭 축소하고 지역 예술인 참여 기회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채 부시장은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한 위대한 대구 시민정신을 기리고 시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고난을 넘어 환희’라는 슬로건 아래 대구오페라축제와 뮤지컬페스티벌, 대구음악제 등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대구문학관(관장 이하석 시인)은 6·25전쟁 70주년 특별전인 ‘피란문단 향촌동 꽃피우다’ 전시를 10월 3일까지 연다. 향촌동의 골목길을 배경으로 김동리, 마해송,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유치환 등 대구로 피란 온 작가들의 모습과 글을 그림과 영상으로 준비했다. 향촌동의 다방과 음악감상실, 극장에서 연출된 문인극에 대한 소개, 당시 출간된 출판물과 피란 문인들의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대구미술관은 최은주 관장 부임 이후 수준 높은 기획으로 미술전문가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코로나19로 석 달간 휴장을 해야 했던 대구미술관은 지난 5월 20일 감격스런 재개관을 맞았다. 코로나19가 재확산하면서 23일부터 28일까지 다시 임시휴관에 들어갔지만 대구미술관은 지역작가와 관객의 온라인 만남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지역작가 12인과 함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모색하는 기획전 ‘새로운 연대’를 9월 13일까지 연다. 쉽게 만날 수 없는 작가의 창작활동과 그들의 내면까지 이해하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 시민들의 평가다.
전시 관람이라는 소박한 일상으로의 복귀였지만 다시 만난 미술관과 전시는 관객과 미술관 사람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음을 확인했다. 예술이 주는 위안은 6·25전란 때나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와의 전쟁 때나 마찬가지임을 시민들은 코로나 시대에 새삼 느끼고 있다.
대구=오경묵 기자 okmoo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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