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 "혁신은 일생의 신념"

입력 2020-08-25 16:14   수정 2020-08-26 01:09

‘100-1=0’ ‘1+1=5’.

경기 용인에 있는 주성엔지니어링 연구개발(R&D)센터에 들어서면 벽면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수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언뜻 난해해 보이는 이 산식에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62)의 경영 철학이 담겨 있다.

“100명 중 한 명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가면 신뢰가 무너집니다. 1에 1을 더하면 2가 산술적인 답이지만 창조적인 사고와 분업적 협력이 뒷받침된다면 5, 아니 그 이상의 시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직 혁신을 통해서만 이런 결과를 끌어낼 수 있죠.”

황 회장에게 혁신은 상투적인 구호가 아니라 일생을 걸고 매달리는 신념이다. “빛의 속도로 지식과 기술, 정보가 공유되는 시대에 혁신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 회사 혁신의 산실인 R&D센터에서도 이런 면모가 엿보인다. 올초 완공된 이곳엔 황 회장의 집무실이 따로 없다. 회의실이 전부다. 토론과 보고, 결재 등 모든 업무가 여기서 이뤄진다. 임원들도 마찬가지다.

“리더의 역할은 업무 효율을 극대화하는 겁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으니 방도 필요없죠. 직원들과 함께 토론하고 결정하는 공간이면 충분합니다.”

그가 1993년 설립한 주성엔지니어링은 반도체 D램 제조의 핵심인 커패시터 전용 증착장비를 1996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반도체 장비에 들어가는 나사 하나조차 국산이면 외면받는 시절이었다. 황 회장은 지금도 매일 오전 7시30분 임직원과의 기술회의로 일과를 시작한다. “학연, 지연, 혈연도 없는 사람이 기득권을 넘어 최고의 자리에 올라설 유일한 방법은 혁신”이라는 이유에서다.
판잣집 출신인 그의 성공 방정식 ‘혁신’
소년 황철주는 가난했다. 경북 고령의 농사 지을 땅도 없던 빈농의 6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암울한 시절, 쌀밥은 구경조차 어려웠다. 황 회장은 “국수에 질려 쉰 살이 될 때까지 일절 입에 댄 적이 없다”고 털어놨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그는 형, 누나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막내만이라도 고등학교까진 보내야겠다는 아버지의 의지가 있었다. 서울 용산에서 판잣집 생활이 시작됐다. 형과 누나는 공장에서 일하며 그를 뒷바라지했다. 농한기엔 부모님이 올라와 리어카에 배추를 싣고 팔러 다녔다. 하루빨리 돈을 벌기 위해 공고 전자과에 진학했다. 단칸방이 비좁아 독서실에서 먹고 자는 날들이 이어졌다.

졸업 후 울산의 한 섬유공장에 취업했을 때 공고 졸업자에게 대학 특례 입학 기회가 주어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사회에 진출해 고졸의 설움을 느끼던 무렵이었다. 그는 인하공업전문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내친김에 인하대 전자공학과로 편입했다.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누구보다 일찍 도서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 제일 늦게 나오는 학생이 그였다. 시험 유형 등 정보에 어두웠던 탓일까. 목표했던 점수를 받지 못했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휴학하고 중소기업에 들어갔다. 주경야독의 고된 삶이었다.

정신없이 일과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눈여겨본 대기업 계열사의 채용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포기하기엔 고생한 세월이 야속했다. 그는 회사 대표에게 편지를 썼다. 성장 과정 등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아 일할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다. 인사담당자에게 연락이 왔다. 1985년 말의 일이다. 그 회사가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였다. 한국에 반도체산업이 움틀 때였다.

반도체 엔지니어로서 정식으로 사회에 진출한 황 회장은 거칠 것이 없었다. 공고 재학 시절부터 쌓은 탄탄한 전문지식과 실무경험까지 갖춘 그였다. 입사 이듬해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여기서 안정된 월급쟁이로 살아가던 그에게 또다시 변화의 시기가 찾아왔다. ASM이 1993년 느닷없이 한국 시장에서 철수를 선언하면서다. 이직과 창업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던 황 회장은 벤처기업가로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기술로 승부를 걸 만큼 자신만만했기 때문이다.
“기업가는 돈만 추구하는 사업가와 달라”
지난 5월 황 회장은 한국벤처기업협회가 마련한 세미나의 강연자로 나섰다. 주제는 ‘기업가 정신’. 황 회장은 “과거엔 ‘빵’을 위해 일하는 ‘헝그리 정신’이 성장동력이었지만 시대가 달라졌다”며 “기업가 정신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말하는 기업가는 단순히 돈을 많이 버는 사업가와 다르다. ‘좋은 일을 통해 행복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그가 꼽는 기업가이자 리더다. 황 회장은 “돌이켜보니 배추 장사하던 부모님이야말로 혁신기업에서 추구해야 할 리더의 본보기였다”고 했다.

“돈이 많고 기득권을 가진 부모님만 자식을 성공시키는 건 아닙니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부모님이 저를 이만큼 키웠습니다. 무한한 사랑과 희생을 감내하는 이가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라고 생각합니다.”

황 회장이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는 건 주성엔지니어링이 겪은 풍파와도 무관치 않다. 창업 3년 만에 개발한 반도체 증착장비로 내수시장의 95%를 장악하는 등 벤처 신화를 쓰던 주성엔지니어링은 몇 년 뒤 갑작스레 주 거래처와 관계가 끊기면서 곤두박질했다. ‘주성은 끝났다’는 악성 루머까지 돌았다. 직원 절반이 회사를 떠났다.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기술혁신이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경쟁에 밀리고 위기를 겪으면서 리더의 역할, 기업가 정신이 무엇인지 많이 고민했다”고 했다.

사옥에 대형 태극기를 내건 것도 그때부터다. 가로 18.0m, 세로 12.7m에 이른다. 미국 출장길에 커다란 성조기가 곳곳에 나부끼는 모습을 볼 때마다 국격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을 내심 동경한 터였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췄다고 자부하는 황 회장의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다시 R&D에 매진했다. 반도체 분야 기술력을 발판으로 디스플레이 증착장비로 영역을 넓혀 시장의 불신에 맞섰다.

태양광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자체 원천기술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태양광 분야까지 일관 체제를 갖춘 곳은 주성엔지니어링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남보다 먼저 생각하고 먼저 행동하는 것이 1등이고 혁신”이라는 그만의 승부수였다. 이는 세 분야의 기술 융복합에 따른 시너지 효과로 글로벌 경쟁사들과의 기술 격차를 더욱 벌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황 회장에게 혁신의 원천은 무엇일까. 평소 책을 많이 읽느냐는 질문에 그는 뜻밖의 답을 내놨다. “책에서 얻는 건 지식인데 이미 과거의 것입니다. 지식을 돈으로 바꿀 수 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스마트폰에 모든 지식이 담겨 있죠. 이제는 쉽게 모방할 수 없는 기술만 돈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은 혁신만이 살길입니다.”

■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

△1959년 경북 고령 출생
△1986년 인하대 전자공학과 졸업
△1993년 주성엔지니어링 대표
△2010년 벤처기업협회 회장
△2010년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
△2015년 청년희망재단 이사장
△2015년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2017년 공학한림원 IP전략포럼 위원장
△2019년 대중소기업 상생협의회 위원장


이정선/민경진 기자 leewa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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