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미술의 대표 작가로 잘 알려진 화가 최민화 씨(66)가 한국 고대사의 주요 장면과 주역들을 캔버스에 불러냈다. 고조선부터 후삼국까지의 역사를 고려 후기 일연 스님이 정리한 ‘삼국유사’를 뼈대로 인물화, 역사화, 풍경화로 담았다.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던 전작들과는 확 달라진 시도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신관에서 열리고 있는 최씨의 개인전 ‘원스 어폰 어 타임(Once Upon a Time)’은 그가 1990년대 말부터 구상하고 20여 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온 동명의 회화 연작 6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최씨는 1982년부터 본명(최철환) 대신 ‘민중은 꽃’이라는 뜻의 ‘민화(民花)’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왔다.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과 저항의 현장을 다룬 ‘부랑’ ‘분홍’ ‘유월’ ‘회색청춘’ 등의 문제적 연작을 2000년대 중반까지 잇달아 내놨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연작은 ‘분홍’ 연작(1989~1999)을 마무리하던 1990년대 말 제작에 착수해 틈틈이 작업을 이어왔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한국 고대사 주역들의 전범이 될 만한 도상(圖像)이나 자료가 없다는 것. 작가는 매년 한두 차례 배낭여행을 떠나 유럽의 신·구교는 물론 이슬람권, 동남아시아 불교문화, 인도의 힌두교 도상까지 답사해 참고했다.
이번 작품들에는 이런 작업 과정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한국 고대사’라는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고조선을 비롯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건국신화와 영웅들의 이야기에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캐릭터와 색감이 섞여 있다. 환웅이 웅녀에게 마늘과 쑥을 건네는 단군신화의 장면이 이브가 사과를 먹자고 아담을 유혹하는 성서의 한 장면과 중첩된다. 신라 향가 ‘서동요’의 선화공주와 서동은 달빛 아래 밀애를 즐기는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 속 남녀로 변주했다. 그의 이번 연작이 어쩌면 낯설고, 어쩌면 익숙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전시장 1층에는 단군신화의 웅녀와 호녀(虎女)를 비롯해 주몽, 큰 활을 든 대궁단인, 주몽과 동이,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성불했다는 달달박박과 노힐부득,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정읍사’의 여주인공 등 고대사의 주인공들을 인물화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들이 걸렸다. 2층 전시장에는 고대의 시공간을 무대로 한 대서사의 장대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천제의 아들 환웅의 신시(神市) 강림, 엄체수를 건너는 주몽, 박혁거세의 난생 장면 등이 한 편의 파노라마 같다.
지하 1층 전시실에선 ‘공무도하가’의 주인공인 백수광부와 그의 처, 내면의 서러움과 고독을 격렬한 춤사위로 표현하는 고려 가요 ‘동동’의 여인 등이 눈길을 끈다. 또한 40여 점의 드로잉과 에스키스는 작가가 이번 연작을 제작하면서 화면 구성과 인물 배치, 표정, 몸짓, 의복 등을 수많은 버전으로 변주하며 도상적 실험을 이어온 20여 년의 타임라인을 보여준다. 최씨는 이를 두고 “스스로 ‘됐다’ 싶을 때까지 반복해야 했던 혹독한 습작”이라고 했다. 전시는 10월 11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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