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우울증을 호소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람과의 관계 단절을 이유로 꼽는다. 가까운 사람조차 만나기 어려운 시대의 ‘우울한’ 단면이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 단절이 우울증만 낳는 것은 아니다. 관심 분야에 푹 빠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기도 한다. 사람을 만나는 대신 스스로를 돌아보고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 이른바 ‘덕질’이다.
덕질은 한 가지 일에 몹시 열중하는 일본어 ‘오타쿠’에서 온 말이다. 오타쿠의 한국식 표현이 ‘오덕후’이고, 오덕후를 줄여 ‘덕후’라는 신조어가 나왔다. 덕질은 덕후가 하는 행위를 뜻한다. 평범한 직장인 김과장 이대리는 최근 어떤 덕질에 빠져 있는지 들어봤다.
국내 한 유통사의 상품기획자(MD) 구 대리가 그렇다. 30대 초반인 그는 요즘 방탄소년단(BTS)의 상징인 보라색 옷에 액세서리로 치장하고 업무를 본다. 재택근무라서 가능한 일이다. BTS가 한국인 최초로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인 ‘핫100’ 1위에 오른 것을 자축하는 자기만의 표현 방식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뭔가 열중할 일이 필요했던 구 대리는 BTS의 1위에 의미를 부여했다. 하루종일 BTS 노래를 틀어 놓고 ‘방구석 콘서트’를 즐긴다. 물론 일을 하면서 음악을 듣는 것이다. 재택근무에 따른 관계 단절을 덕질로 견딘다는 게 그의 얘기다.
스포츠 스타도 덕질의 대상이 된다. 수도권의 한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골드미스’ 정 과장. 회식, 야근이 사라진 요즘 그는 저녁 6시 이전에 집에 도착한다. 정 과장은 퇴근 후 컴퓨터로 프로야구를 본다. 응원하는 선수는 LG트윈스 신인 선발투수 이민호. 네이버 중계를 보면서 댓글을 계속 올린다. 이민호가 나올 땐 댓글이 주렁주렁 달린다. 정 과장 같은 누나팬들이 다는 댓글이 적지 않다.
한 국내 대기업에 다니는 최 과장은 지난주 드라마에 입덕했다. 2018년 방영한 아이유(이지은), 이선균 주연의 16부작 ‘나의 아저씨’를 이틀 만에 다 봤다. “드라마 속 중년 직장인의 모습에 공감이 가서 깊이 빠져들었다”고 한다. 드라마에 눈을 뜬 최 과장은 다음에 볼 드라마로 ‘부부의 세계’와 ‘비밀의 숲 시즌 2’를 골라놨다. 그가 ‘코로나 블루(우울증)’를 버티는 힘은 드라마가 돼버린 셈이다.
‘뮤덕’(뮤지컬 덕후) ‘클덕’(클래식 덕후)도 늘고 있다. 공연장에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온라인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그동안 공연 아카이브 공개를 꺼려 온라인 실황 중계가 적었던 세계적인 공연을 볼 기회도 늘었다. 이들 덕분에 75인치 이상 초대형 TV와 빔프로젝터, 초고급 헤드폰 등의 판매가 크게 증가했다.
대학 시절 국악동아리에서 아쟁을 연주했던 최 대리는 요즘 퇴근 후 국립국악원, 국립창극단의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것이 삶의 낙이다. 연주를 해본 터라 전문 국악인이 아쟁을 켜는 것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국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온라인 모임도 한다. 유튜브에서 ‘구독’ ‘좋아요’를 누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과 영상을 공유하고 추천도 한다. 최 대리는 “직장에선 아쟁이 무슨 악기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온라인에선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다.
중소기업에 근무 중인 고 대리는 최근 ‘온라인 북페스티벌’을 구경하는 데 재미가 들렸다. 독립출판에 관심이 많은 고 대리의 평소 취미는 소규모 출판 페스티벌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올해 오프라인 행사는 줄줄이 취소됐다. 지난 1일 온라인으로 열린 ‘서울아트북페어’는 그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고 대리는 “홈페이지에 책 표지가 나열돼 있어 마치 행사장에서 책을 둘러보는 느낌을 받았다”며 “코로나19로 인한 ‘집콕’ 기간에 나만의 글을 써 올해는 꼭 직접 독립출판을 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30~40대는 경제적으로 10~20대보다 여유가 있어 관심 분야에 지갑을 쉽게 연다. 아이돌 굿즈 시장만 해도 연간 2000억원으로 추정될 정도다. 아이돌 인형부터 스티커, 메모지, 캐릭터 상품 등 다양한 굿즈가 연일 새롭게 나오고 있다.
연예인 덕질을 하면서 ‘재테크’를 하는 사례도 있다. 서울의 한 채용회사에 근무하는 박 대리는 최근 코로나19로 일감이 줄자 ‘음반 덕질’을 하고 있다. 국내 발매가 끝났거나 한정판으로 판매하는 밴드의 희귀 음반을 사 모아 네이버 쇼핑에서 재판매하고 있다. 평소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최근 아예 이 일을 ‘부업’으로 삼고 있다. 박 대리는 “작년에 모 밴드의 음반을 산 뒤 인터넷에 되팔아 수수료를 제외하고도 30만원이나 벌었다”고 했다. 그는 “희소성 있는 음반은 가격이 2~3배 뛰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박 대리의 최근 구매 목록은 ‘레트로’(복고) 열풍으로 각광받고 있는 LP판이다. 소장하고 있다가 가치가 오르면 재판매할 생각으로 여윳돈이 생기면 한 장씩 사들이고 있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