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韓銀을 '정부 ATM'쯤으로 여기는 여권 인사들

입력 2020-09-08 17:51   수정 2020-09-09 00:17

주요 현안에 대해 거침없는 의견을 밝혀온 이재명 경기지사가 이번에는 ‘영구국채’를 들고나왔다. 그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가의 가계이전소득 지원으로 가계소득을 늘려 가계부채를 줄이고 재원은 금리 0%인 영구국채로 조달하자는 최배근 교수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썼다.

더불어시민당 대표를 지낸 최배근 건국대 교수는 “한국은 가계소비가 기형적으로 크고 정부부채는 지나치게 낮다. 상반기 민간소비가 지난해보다 27조원 줄어들어, 연 54조원 규모가 감소했다”며 “해당 규모만큼의 가계 소비지출 지원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재원은 “정부가 0% 금리 국채를 발행하고 한국은행이 인수하는 방식으로 조달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두 사람은 2차 긴급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을 주장해왔다. 당정이 ‘선별 지급’을 결정하자 0% 국채를 들고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정부가 돈이 필요하면 한국은행이 돈을 찍고 정부는 그냥 가져다 쓰면 된다”는 식이어서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재정적자는 걱정 말고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자는 소위 현대화폐이론(MMT)을 따르자는 것이다.

MMT는 검증되지 않았고 정통 경제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가설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부작용이 상당히 크고 본격 채택한 나라는 없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다. 제롬 파월 미 중앙은행(Fed) 의장은 MMT가 틀렸다고 했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과도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많다.

그런데도 여권 인사들이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당장 공짜돈을 준다고 하면 대중의 주목을 끌고 지지도가 올라간다. 최 교수는 “국가채무 비율에 대한 우려가 주술에 가깝다”며 “훨씬 더 과감한 재정지출이 필요하다”고까지 주장했다. 매우 무책임한 발언이다.

한국은행은 세 차례 추경 등으로 이미 쏟아진 국채 물량을 소화하는 데도 바쁘다. 어제도 국채금리 안정을 위해 5조원의 국고채를 추가로 매입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은의 자산이 이렇게 늘면 금리나 환율정책을 펴는 데는 그만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은의 영구국채 인수가 비현실적인 이유다.

한국은행은 정부가 수시로 돈을 꺼내 쓸 수 있는 ATM(현금자동입출금기)이 아니다. 정치인들의 필요에 의해서 동원되는 조직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여당 관계자들은 툭하면 ‘금리 훈수’를 두는 등 그런 유혹에 쉽게 빠져든다. 각국이 괜히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게 아니다. 위기일수록 통화정책의 최후 보루를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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