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넘쳐나는데…유통속도는 '사상 최저'

입력 2020-09-15 17:34   수정 2020-09-25 16:26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유동성은 140조원 불었지만 실물경제에 돈은 제대로 돌지 않고 있다. 코로나19가 언제 종식될지 알 수 없게 되자 기업과 가계가 투자와 소비를 줄이면서 돈은 금융권에만 맴돌고 있다. 이 때문에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가격은 뛰지만 실물경제는 침체에 빠지는 ‘자산·실물 괴리’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1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 시중 통화량(M2)은 3094조2000억원으로 정부와 한은이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돈을 풀기 전인 2월(2954조6000억원)에 비해 140조원가량 늘었다. M2가 이처럼 커진 것은 한은이 기준금리를 연 1.25%에서 연 0.50%로 내리고 한은과 정부가 시중에 자금 공급을 늘린 결과다.

시중에 돈이 적잖게 풀렸지만 소비·투자 등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돈이 얼마나 잘 도는지를 나타내는 통화유통속도(명목 국내총생산을 M2로 나눈 값)는 올 2분기 0.63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2018년 4분기 0.71, 2019년 4분기 0.68로 해마다 낮아지는 가운데 올 들어선 코로나19 사태로 그 하락폭이 커졌다.

통화유통속도는 화폐 한 단위가 일정 기간 동안 얼마만큼의 부가가치(국민소득)를 창출했는지를 보여준다. 예컨대 통화유통속도가 1이면 화폐 한 단위를 풀면 생산이 1 늘었다는 의미다. 통화유통속도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1을 웃돌았다.

또 다른 지표인 통화승수(통화량÷본원통화)도 올해 7월 14.9배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한은이 시중에 1원을 공급했을 때 시중 통화량은 14원90전 늘었다는 의미다. 통화승수는 2018년 말과 2019년 말 모두 15.6배를 기록해 정체 상태를 보이다가 코로나19 충격으로 사상 처음 15배 아래로 떨어졌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돈을 풀어도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않고 가계는 돈을 쌓아두고만 있다”며 “이른바 ‘유동성 함정’ 상황으로, 한은의 통화정책 고민이 커졌다”고 평가했다.

돈 풀어도 예금으로 63兆 들어와…실물경제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
한국은행과 정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돈을 대거 풀고 있다. 하지만 그 효과는 한은과 정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전에 비해 시중에 돈이 도는 속도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늘어난 유동성은 실물경제로 흘러들지 않고 금융권과 자산시장에만 머물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져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시중에 돈이 얼마나 잘 도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지표인 통화유통속도와 통화승수는 올 들어 사상 최저 기록을 쓰고 있다. 가계·기업이 소비와 투자 등으로 돈을 주고받는 활동이 그만큼 줄었다는 뜻이다. 돈을 풀어도 금융권의 총예금이 올 2월부터 7월까지 63조원 늘면서 실물로는 흘러들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올 성장률은 -1.3%(한은 전망치)로 외환위기 때인 1998년(-5.1%) 후 최악을 나타낼 것으로 관측된다.

시중에 넘치는 유동성은 단기자금화하면서 부동산·주식 가격을 끌어올리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 현금과 현금으로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요구불예금, 수시입출식 저축성예금 등을 합친 단기자금은 올 7월 말 기준 1198조922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지난해 말에 비해 152조5000억원 늘었다.

하지만 주가·부동산 가격 상승은 생산활동의 부가가치를 구하는 국내총생산(GDP)에 반영되지 않는다. 주가·부동산 가격 급등이 실물경제에 외려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부동산 등 자산 거품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시중 유동성이 집값 과열을 부추기는 최근 한국 경제의 양상은 1980~1990년대 일본 경제와 비슷한 모습”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불안을 느낀 가계·기업이 소비·투자를 주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오락가락하는 부동산 정책과 추가경정예산안(추경) 편성 등 정부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도 가계·기업을 움츠러들게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7월 한국의 경제정책 불확실성(EPU) 지수는 313.44로 1990년 통계를 작성한 이후 일곱 번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스콧 베이커 미국 노스웨스턴대 교수 등이 개발한 이 지수는 기준치인 100보다 높으면 불확실성 확대, 낮으면 축소를 뜻한다.

유동성 함정에 빠진 한국 경제의 흐름이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일본은 경기가 침체되던 1998년 9월 기준금리를 연 0.50%에서 연 0.25%로 인하하고 2001년 1월까지 금리를 동결했다. 하지만 1998~2001년 연평균 성장률은 0.5%에 머물렀다. ‘저성장·저물가·저금리’ 등 3저(低) 현상이 뚜렷해졌다. 일본인이 저금리에도 씀씀이를 좀처럼 늘리지 않은 영향이다. 한국도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마이너스 금리와 극단적 유동성 확대정책으로 유동성 함정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자본 유출을 우려하는 비기축통화국인 한국의 경우 이 같은 정책을 펴기 어렵다. 최근 불거진 유동성 함정 현상이 자칫 일본식 장기 불황으로 진입하는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통화정책 실효성이 크지 않은 상황이고 그만큼 정부 재정 정책의 역할이 커졌다”며 “중장기적으로 규제 등을 완화하고 단기적으로 적절한 곳에 재정을 쏟아 수요를 끌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유동성 함정

중앙은행이 경기 부양을 위해 아무리 유동성을 공급해도 시중에 돈이 돌지 않고 소비·투자로 연결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20년대 세계경제 대공황 때 통화량을 늘렸지만 경기가 살아나지 않자 제기한 학설이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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