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다. 갑자기 이사를 해야 했는데, 전학이 쉽지 않았던 상황이라 한 시간 넘는 거리를 통학해야 했다. 혼자 먼 길을 오가는 게 두려웠을 법도 하지만 변변한 놀이터 하나 흔치 않던 시절, 나만의 버스 투어는 즐거운 놀이였다. 언제부턴가 버스 맨 앞자리는 고정석이 됐다. 단성사 간판을 보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벤허’의 주인공을 자연스레 기억하게 됐고, 청계천 상가의 이름 모를 공구들로 로봇을 만드는 상상도 했다. 등하굣길 차창 밖 세상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기한 장면으로 가득했다.
이런 추억 덕분에 훗날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게 된다. 해외에서 근무하던 시절, 초등학생 딸 아이는 긴 통학 거리 때문에 지하철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당장의 편리함보다 ‘경험’을 물려주고 싶었다. 걱정하는 아내에게는 ‘귀한 자식일수록 멀리 여행을 보내라’는 명언을 핑계 삼았다. 오가며 마주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지혜를 쌓아 가길 바랐다. 참 다행히도 아이는 큰 불평 없이 학창 시절을 보냈고, 제법 듬직한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아비의 소소한 추억으로 인한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씩씩하게 잘 자라줘 고마울 따름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언뜻 보면 책상 앞을 지키며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기를 독려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정작 이 말을 남긴 프랜시스 베이컨은 경험과 실증을 강조했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그가 말한 ‘아는 것’은 지식보다 지혜에 가까웠을 것이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역량도 바뀌고 있다. 정보의 개방성이 높아지고 공유 속도는 더 빨라졌다. 지식 자체가 아닌, 그것을 적용하고 융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능력이 주목받고 있다. 지식의 양이 같더라도 지혜의 깊이는 다를 수 있다. 지식을 지혜로 연결하는 것은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에서 호기심을 유지하고 경험의 개체 수를 늘려야 하는 이유다.
요즘 가장 큰 고민은 ‘후배들에게 어떻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줄 것인가?’다. 저들의 성장을 격려하고 돕는 일은 미덕이 아니라 의무일 것이다. 하지만 거창한 훈계와 지나친 간섭은 필요치 않아 보인다. 따뜻한 안부 인사에 다정한 설명 한두 마디 보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옛날 신나는 버스 투어에 함께해 준 127번 버스 기사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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