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33)는 최근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주자 중 한 명이다. 지난달 열린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이어 21일(한국시간) 막을 내린 독일 베를린 음악축제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1~32번)을 8회 공연에 걸쳐 연주했다. 오는 11월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에서도 전곡 연주를 이어간다. 피아니스트들이 평생 한 번 하기도 힘든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를 약 4개월 동안 세계적인 유럽음악축제에서 3회 연속 완주하는 것이다. 뛰어난 연주력과 음악성뿐 아니라 넘치는 열정과 에너지가 없으면 할 수 없는 도전이란 평가가 나온다. 한정호 음악평론가는 “러시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독일로 이주해온 ‘디아스포라’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세운 레비트는 베토벤 소나타 연주에서 기존과 동떨어진 해석을 해왔다”며 “자신의 미성숙함을 인정하고 건반을 치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관객들이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게 강점”이라고 평했다.
거장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77)은 다음달 도이체그라모폰(DG)을 통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낸다. 이미 명반으로 꼽히는 전집 앨범을 여러 차례 냈던 그로서는 쉽지 않은 도전이다. 바렌보임은 자신의 SNS를 통해 “베토벤 소나타를 수없이 연주했지만 건반 앞에 앉으면 매번 새롭다”며 “베토벤 음악을 들을 때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람이 돼가고 있음을 느낀다”고 밝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도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와 앨범 발매가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로 올해 예정된 대형 ‘베토벤 프로젝트’들이 줄줄이 취소됐지만 교향곡과 함께 베토벤의 최대 음악적 유산이자 성취로 평가받는 피아노 소나타에 대한 피아니스트들의 전 세계적인 연주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국내도 예외는 아니다. 더하우스콘서트가 지난 7월 31일 하루 동안 약 10시간에 걸쳐 진행한 전곡 연주회가 대표적이다. 문지영의 1번부터 박종해의 32번까지 국내 내로라하는 피아니스트 32명이 참여해 한 곡씩 번갈아가며 연주한 릴레이 콘서트는 유튜브로 생중계돼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손민수는 2017년 시작한 전곡 연주 대장정을 오는 12월 마무리한다. 지난 14일 전곡 앨범을 발매한 그는 이달에 후기 소나타 30~32번을 연주하는 전국 독주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인해 연말로 투어 일정을 미뤘다. 20일 프랑스 툴루즈 자코뱅 수도원에서 소나타 30~32번을 들려준 김선욱도 12월 전국을 돌며 후기 소나타 독주회를 연다. 2018년 전곡 연주회를 시작한 백혜선은 올가을 코로나19로 취소된 마지막 연주회를 내년 상반기에 연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회나 앨범 발매는 피아니스트들의 ‘버킷 리스트’로 꼽힌다. 피아니스트들에게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전곡’이 ‘구약성서’라면 베토벤 소나타는 ‘신약성서’다. 23년에 걸쳐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전곡은 베토벤의 거대한 음악세계를 이해하고 탐구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2007년에 이어 2017년 전곡 연주에 나섰던 ‘건반 위의 구도자’ 백건우는 당시 “거인 앞에 선 기분”이라며 “베토벤 탐구는 끝없는 여정”이라고 했다. 2012년 24세 나이에 EMI클래식을 통해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발매해 화제가 된 임현정은 “베토벤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피아노 선율에 옮겼다”며 “피아노 소나타를 통해 그의 생애를 되짚어보면 음악의 궁극적 본질인 ‘인간성’을 살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악성(樂聖)’의 특별한 해를 맞아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에 빠져들어 연주하는 이유도 ‘성찰’과 ‘성장’에 있다는 설명이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은 “베토벤이 따로 의도한 바를 남기지 않아 연주자들이 곡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도 소나타 전곡의 매력”이라며 “코로나19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전곡 연주에) 나섰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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