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産 이베리코, 흑돼지 맞나"…고깃집 사장이 증명하라는 정부

입력 2020-09-28 17:35   수정 2020-09-29 01:21

대구 달서구에서 ‘스페인산 이베리코 돼지고기 전문점’을 운영하는 A씨는 최근 달서구청 위생과로부터 황당한 시정명령을 받았다. 내용은 이렇다. “간판과 메뉴판에 쓰인 ‘이베리코 흑돼지’에서 ‘흑돼지’를 모두 빼거나, 이베리코 돼지가 흑돼지라는 것을 증명할 증빙서류를 제출하라.”

A씨는 코로나19로 올해 매출이 반토막 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목돈이 들어가는 게 걱정됐다. 수차례 구청에 시정명령 철회를 문의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똑같았다. “증빙서류가 없으면 간판, 문구 등을 모두 바꾸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A씨는 고기를 받는 수입업체에 증빙 방법을 문의했다. 그러나 업체에서는 “돼지고기 등급 확인은 할 수 있으나 돼지의 피부가 흰색인지 유색인지에 대한 증빙 자료는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난색을 보였다.

논란의 시작은 작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해 6월 국내 일부 외식업계로부터 이베리코 흑돼지 광고영업 행위에 대한 불만이 제기되자 해당 업체들에 “이베리코 돼지는 100% 흑돼지가 아니므로 흑돼지라고 간판이나 메뉴에 표기하면 과장광고 혐의로 7월부터 영업정지가 내려질 수 있다”는 안내문을 보냈다. 업계는 혼란에 빠졌다. 스페인의 축산법 품종 관련 규정에는 ‘이베리코 돼지는 강렬한 검정과 검정 계열의 다양한 체색(體色)을 나타낸다’고만 돼 있다.

스페인 대사관까지 나서서 흑돼지 문제를 조정해보려 했지만 한국 기준에 맞추려면 스페인 축산법 문구까지 고쳐야 하는 상황이 됐다. 더 큰 문제는 이베리코 흑돼지에 대한 규제를 강행할수록 국내 흑돼지 관련 산업까지 규제를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에 몰리게 된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 관련법에도 흑돼지를 흑돼지라고 부를 수 있는 판별법이나 규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법령엔 돼지를 털 등의 색깔에 따라 ‘백색 돼지’와 ‘유색 돼지’로 나눌 뿐이다. 흑돼지에 대한 규정은 없다. 유전적으로 흑돼지를 판별하는 방법도 없다. 국내산 ‘흑돼지’는 수입 버크셔 품종으로, 바탕에 흰색 점이 들어가거나 검붉은 색의 털들이 나 있다. 제주도와 지리산 일대에서 키우는 흑돼지들은 기타 95% 백색 돼지에 비해 희소성과 맛 등을 평가받아 프리미엄 가격에 팔리고 있다.

이베리코 흑돼지를 규제하려는 정부의 논리대로라면 시중에서 ‘제주산 흑돼지’나 ‘지리산 토종 흑돼지’를 취급하는 모든 농가와 유통업체들이 상호와 광고 문구 등을 다 바꿔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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