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디트스위스의 ‘2019 부(富)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에서 100만달러 이상 순자산을 보유한 사람이 약 74만 명이다. 미국(1860만 명)과 중국(450만 명), 일본(300만 명)에는 못 미치지만 꽤 많은 숫자다. 한국인의 자산에서 65%를 차지하는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라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요즘 화폐가치를 감안하면 백만장자는 자타 공인하는 부자로 보기 어렵다. 미국에는 10억달러(약 1조1700억원) 이상 자산가인 ‘억만장자(billionaire)’도 수두룩하다.
최근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이 10억원을 넘어섰다. 미국 고급 주택의 중위가격인 82만5000달러(약 9억7000만원)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서울에서 빚 없이 아파트를 산 이들의 절반은 100만달러(약 11억7000만원) 이상 자산가인 ‘백만장자(millionaire)’ 대열에 합류하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돈의 가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주식 아파트 등 자산가격 급등은 ‘화폐의 타락’(화폐가치의 추락)이 몰고온 환상이거나 착시일 수 있다. 코로나 위기 속에 물가가 오르지 않았을 뿐, 전 세계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은 각국 자산 인플레이션의 뇌관이 되고 있다. 실물경제는 추락하는데도 오로지 ‘돈의 힘’으로 화폐로 표시되는 주가 집값 금값을 밀어올리는 것이다.
시중에 돈이 넘쳐나는 바람에 자신이 백만장자가 된 듯 착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언젠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른다. 인플레이션이 쓰나미처럼 경제를 휩쓰는 ‘화폐의 보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없이 경험했다. “한 사회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수단 가운데 화폐의 타락만큼 교묘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다”는 금언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요즘이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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