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트 앤더슨(1936~2015)의 《상상된 공동체》는 민족에 대한 이런 통념에 도전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민족에 대한 앤더슨의 정의는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공동체’다. 종교와 왕정의 정당성이 의심받고 급속도로 무너진 18세기 말에 와서야 발명되다시피 세계사 전면에 등장한 개념이 민족이라는 주장이다. 실체가 불분명하지만 필요에 의해 상상돼 마치 ‘유령’처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았다는 분석이다.
이런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은 출간 당시부터 주목받았고, 지금도 세계 사회과학도의 인용빈도 최상위권에 오르내리는 원동력이다. 오해 말 것은 ‘상상된 공동체’라고 해서 민족을 ‘허구’나 ‘가짜’로 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혈연 등으로 얽힌 무의식 깊은 곳으로부터의 숙명과도 같은 집단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많은 국가들이 민족의 이름으로 삶을 영위하면서도 민족, 민족성, 민족주의 같은 말은 정의조차 힘들다”는 게 앤더슨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종교 공동체의 붕괴와 왕권의 약화에 주목했다. “종교가 힘을 잃으면서 삶의 영원성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고, 그 공허한 삶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데 민족보다 잘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고 본 것이다. 신앙이 사그라들면서 터져나오는 실존적 고민과 고통을 ‘민족이라는 새로운 발명품’에 의지해 위로받은 셈이다.
앤더슨에 따르면 민족과 민족주의는 18세기 말 태동해 20세기에 꽃피웠다. 유럽 식민지였던 남북아메리카 대륙이 민족주의 발현지다. 식민지 이주 백인의 자손인 ‘크리올’은 혈통상 유럽인이면서도 차별대우를 받았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민족 개념이 부상했다는 것이다. “크리올은 정체성 혼란에 맞서서 유럽 공동체들과 비교할 만한 평행한 공동체를 상상했다.”
이렇게 태어난 민족주의는 상상되자마자 유럽과 아시아에서 빠르게 모방됐다. “제정러시아 헝가리 영국 일본 태국 등의 왕조국가도 ‘민족’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찾으려고 아메리카 민족주의를 표절했다.” 이런 흐름에 앤더슨은 ‘관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민족주의의 ‘마지막 물결’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 국가에서 일었다. “1차 대전 뒤 왕조주의가 종지부를 찍으면서 정당성 있는 국제규범으로 부상했고, 2차 대전 이후 민족국가 조류가 만조에 이르렀다.”
《상상된 공동체》는 민족주의 등장이 자본주의적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인쇄 자본주의’의 발달에 주목했다. “인쇄기술 발달로 인해 대중적 언어에 기반한 출판산업이 번성하면서 사람들의 이성과 세계관이 동질화되고 민족 개념이 촉진됐다”는 해석이다.
그렇지만 “민족주의는 대부분의 ‘주의(ism)’와 달리 독자적 사상가조차 배출하지 못할 만큼 이념적으로 공허하다”는 게 앤더슨의 설명이다. 그는 “지식인들이 공허한 민족주의를 깔본 탓에 민족주의에는 홉스들도, 토크빌들도, 마르크스들도, 베버들도 없다”고 적었다. ‘우연히 한 곳에 태어났다’는 우연적 사실을 운명적 필연으로 간주하도록 만드는 민족은 ‘마술’이자 덫이라고 했다. 나아가 “민족주의 등장 이전에 의심없는 준거의 틀로 받아들여진 문화적 체계인 종교 공동체와 왕조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사라졌다”며 상상의 공동체도 언제든 소멸될 수 있다고 봤다.
민족에 대한 이 책의 시선이 ‘부정 일변도’는 아니다. 종교, 왕조라는 고전적 공동체 이후에 등장했다는 진단부터 상대적으로 진화한 형태라는 함의를 깔고 있다. “민족은 때로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고취하며, 잘 문명화된 민족주의는 삶을 안정되게 만든다”며 도덕적 장엄함과 기능적 장점을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강한 수평적 형제애나 사랑의 감정은 공동체 내부로만 향할 뿐, 외부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형태로 나타나기 쉽다”며 경계심을 높였다. “역사적 숙명으로, 그리고 언어를 통해 상상된 공동체인 민족은 열려 있으면서 동시에 닫혀 있다”는 앤더슨의 관찰은 낭만적 민족주의에 대한 분명한 경고로 읽기에 충분하다.
백광엽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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