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연속적 혁신'이 낳은 포노사피엔스…스마트폰 속 40년 절친은 완벽한 타인이었다

입력 2020-10-09 17:28   수정 2020-10-10 00:25


석호 태수 준모 영배. 친구 넷은 40년 지기 초등학교 동창생이다. 서로는 물론 배우자끼리도 친밀하게 지내는 ‘절친 4인방’은 어느 날 석호의 집들이에 초대받는다. 이혼한 영배를 제외하고 각자의 배우자까지 일곱 명이 모두 모인 저녁자리. 석호의 아내인 예진이 제안한다. “우리 게임 한 번 해볼까? 다들 핸드폰 올려봐. 저녁 먹는 동안 오는 모든 걸 공유하는 거야. 전화 문자 카톡 이메일 할 것 없이 싹.”
스마트폰에 의존하는 포노사피엔스
예진의 제안으로 평범하던 집들이 자리엔 긴장감이 돈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자부하는 친구들과 배우자들은 호기롭게 게임을 시작한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식탁 위에 올리고 식사하다가 울린 첫 번째 전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영배의 아버지로부터 온 연락에 친구들은 초등학교 시절 과거를 추억한다. 게임은 훈훈하게 흘러간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스마트폰은 점점 인물들의 비밀을 드러낸다.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써왔던 부부간의 갈등, 40년 지기 친구들에게도 감춰온 성 정체성, 철석같이 믿은 배우자의 외도, 전 재산을 날릴 위기에 처한 배우자의 투자 실패까지…. 인물들이 감춰온 비밀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스마트폰 메시지와 전화를 공유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완벽한 지인’이라고 생각했던 서로가 사실은 ‘완벽한 타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완벽한 타인’은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새로운 인류를 의미하는 ‘포노사피엔스’의 단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포노사피엔스는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처음 사용한 신조어다. 지혜로운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사피엔스’ 앞부분에 폰(phone)을 붙여 변형했다.
포노사피엔스의 세상에 비밀은 없다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일상생활을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는 모습이 꾸준히 비춰진다. 스마트폰은 단순 소통 기능을 넘어선다. 영배는 스마트폰에서 운동시간 알람이 울리면 무조건 운동을 한다. 태수의 아내인 수현은 스마트폰으로 시어머니 한의원을 예약하고, 필명으로 소설을 써서 올린다.

포노사피엔스 시대에 사람들은 신체의 일부처럼 스마트폰을 다룬다. 개인적인 정보를 저장하고 언제든 꺼내 쓴다. 스마트폰을 잠시 공개하는 것만으로 가장 내밀한 비밀이 드러난다는 영화의 설정은 그래서 설득력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내 주변 사람들과 같은 게임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되는 건 우리 모두가 포노사피엔스라는 방증이다.

극 중 게임을 제안한 예진의 대사는 포노사피엔스들의 스마트폰에 대한 생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아무튼 이 핸드폰이 문제야. 쓸데없이 너무 많은 게 들어 있어. 통화내역, 쇼핑내역, 문자, 위치, 스케줄. 완전 인생의 블랙박스라니까.”
불연속적 혁신으로 탄생한 스마트폰
스마트폰처럼 소비자들의 행동을 엄청나게 변화시키는 혁신을 경제학자들은 ‘불연속적 혁신’이라고 부른다. 불연속적 혁신은 기술 발달 과정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기술이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연속적 혁신으로 탄생한 제품은 소비자들에게 기존에 없던 강력한 혜택을 준다.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불연속적’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기존 기술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때 생기는 연속적인 혁신과 비교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피처폰 시대에 스마트폰이 등장한 것은 불연속적 혁신이다. 피처폰 시대엔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스마트폰 시대엔 가능해진다. 반면 스마트폰의 크기가 커지거나 다양한 기능이 추가되는 건 연속적인 혁신이다. 연속적 혁신은 소비자의 행동을 변화시키지 않지만 불연속적 혁신은 소비 패턴을 완전히 바꾼다.

불연속적 혁신은 소비 패턴뿐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도 바꾼다. 절친 4인방 가운데 태수의 비밀은 텔레그램에서 만난 사람이 매일 같은 시간에 자신의 사진을 보내준다는 것.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생길 수 없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인간관계다.

산업 지형도도 뒤집어 놓는다. 혁신기업이 모인 나스닥 시가총액 상위 기업들은 대부분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덩치를 불릴 수 없었을 기업들이다. 나스닥 시가총액 1위인 애플은 물론 2위인 아마존닷컴, 구글의 지주회사인 알파벳, 페이스북 등은 스마트폰과 여기서 나온 앱 경제를 이끄는 기업들이다.
행동경제학으로 본 스마트폰 중독
불연속적 혁신이 부르는 소비자 행동 변화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포노사피엔스 사회엔 스마트폰 중독이라는 어두운 면도 있다. ‘완벽한 타인’의 인물들 역시 때로는 스마트폰 중독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스마트폰 없이는 저녁자리 테이블을 벗어나지 않으려 하거나 스마트폰이 없을 때 불안증세를 느끼는 게 스마트폰 중독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경제학자들은 스마트폰 중독을 ‘시간 할인율’이라는 개념으로 바라본다. 시간 할인율은 미래의 효용을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평가하는지 나타내는 개념이다. 행동경제학에선 사람들이 오늘 벌어지는 일과 1주일 뒤 벌어질 일의 효용을 다르게 여긴다고 본다. 먼 미래 사건의 효용은 더 낮게 평가하고, 가까운 미래 사건의 효용은 더 높게 평가한다는 얘기다.

행동경제학자들은 미래 사건의 가치를 더 낮게 평가하는 사람일수록, 즉 시간 할인율이 높은 사람일수록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현상이 강하다고 본다. <그래프1>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의 효용보다 운동하는 것의 효용이 더 크다. 둘이 각각 실현된 시점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미래에 실현될 일은 지금으로서는 효용이 더 낮게 느껴진다. 오늘 손에 쥐는 100만원과 1년 뒤 손에 쥐는 100만원의 가치를 다르게 평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프 가로축에서 0으로 표현된 현재 시점의 나는 이제 스마트폰 사용을 줄이고 밖에서 운동을 하자고 다짐한다. 지금의 나는 스마트폰보다 운동의 효용을 더 크게 평가한다. 뿌듯함과 건강의 효과가 더 크다는 걸 머리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 A시점에 스마트폰과 운동을 비교하니 효용의 크기가 뒤바뀐다. 당장 얻을 수 있는 작은 효용이 미래의 큰 효용보다 커 보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효용을 더 크게 할인하는 사람일수록 당장의 효용이 더 작아도 쉽게 유혹에 넘어간다. <그래프2>는 미래 효용을 얼마나 많이 할인하느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나타낸 그래프다. 미래 운동의 가치를 적게 할인하는 사람은 스마트폰 대신 운동을 하러 나가지만 미래 운동의 가치를 많이 깎아버린 사람은 스마트폰을 택한다.

나수지 기자 suj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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