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국내 건전지 시장의 판도가 바뀌었다. 해외 브랜드가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국내 브랜드를 하나둘 사들였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국내 건전지 회사의 내수 점유율은 20% 밑으로 떨어졌다. 남아 있는 일부 국내 업체는 ‘100% 국내 생산 건전지’라는 마케팅을 펼치며 산업의 명맥을 잇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듀라셀 브랜드를 소유한 P&G는 1996년 서울통상의 썬파워 브랜드를 인수했다. 이어 1998년 로케트 브랜드를 800억원에 사들였다. 이후 로케트전기는 P&G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으로만 건전지를 공급하는 하청업체 역할을 하게 됐다. 이 시기 에너자이저는 TV 광고 속 백만돌이 캐릭터를 내세워 빠르게 내수 점유율을 높여갔다.
국내 업체들은 1997년 불어닥친 외환위기로 생사기로에 놓인 때였다. 로케트전기 출신인 차인범 알이배터리 대표는 “폐업 위기에 놓인 기업은 임시방편으로 브랜드를 매각해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던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서울통상은 1999년 자체 브랜드인 ‘벡셀’을 출시하며 재기에 나섰지만 해외 브랜드와의 경쟁에 밀려 2003년 끝내 부도를 맞았다. 로케트전기 역시 2차전지 등 신규 사업을 시도하며 새로운 성장동력을 모색했으나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2016년 폐업했다. 업계에선 국내 건전지 시장 규모를 약 1700억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중 에너자이저, 듀라셀 등 해외 브랜드가 75%를 장악하는 시장으로 굳어졌다.
건전지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소매점에 유통되는 건전지 중 70% 이상은 중국에서 OEM 방식으로 생산하는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국산 건전지의 명맥은 벡셀과 알이배터리가 잇고 있다. 부도 난 벡셀은 2005년 삼라마이더스(SM)그룹에 인수됐다. 현재 중국에서 OEM 방식으로 수입한 건전지와 경북 구미공장에서 생산한 국산 제품을 국내 시장에 공급하고 있다. 전지 제조 기술력을 바탕으로 2차전지, 특수전지, 가전, 이모빌리티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알이배터리는 2015년 로케트전기 출신 임직원이 세운 회사다. 로케트전기 광주공장을 사들여 ‘쎈돌이’라는 자체 브랜드를 출시했다. 하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부족한 탓에 시장 안착에 실패하며 폐업 위기에 몰렸다.
생활용품기업 크린?은 올초 이 회사를 인수해 지난 8월 ‘하이퍼맥스’라는 건전지 브랜드를 선보였다. 크린? 관계자는 “옛 로케트전기가 70년간 쌓은 제조 기술력과 100% 국내 생산이 주는 신뢰를 바탕으로 외국산 중심의 국내 건전지 시장을 재편해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