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상자산(암호화폐) 업계에선 카카오 계열사인 그라운드X가 만든 블록체인 '클레이튼(Klaytn)'과 가상자산 '클레이(Klay)'를 주목하는 분위기입니다.
50조원 규모의 기업가치를 자랑하는 미국의 전자결제 1위 기업 '월드페이'와 1억명이 넘는 동남아시아 사용자를 보유한 메신저 앱 잘로(Zalo)의 운영사 'VNG' 등 굵직한 기업들이 클레이튼의 공동 운영사로 합류하며 글로벌 시장 선점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한때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의 주도권은 페이스북의 '리브라(Libra)'가 쥘 것이라는 예측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왔습니다만, 각국 중앙은행의 압박에 리브라 사업 추진이 어려워진 사이 우리나라의 카카오 클레이튼이 새 강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의 추진력에 힘입어 카카오는 2018년 3월 블록체인 개발사인 그라운드X를 설립하고 같은 해 가상자산 클레이를 발행, 글로벌 블록체인 생태계 구축을 위한 기반을 빠르게 다져 왔습니다. 지난해 6월 출범한 리브라보다 무려 1년3개월 가량 앞서나갔죠.
그라운드X 수장으로는 블록체인 전문가이자 KT넥스알·퓨처플레이 설립자 출신인 한재선 대표가 발탁, 모든 플랫폼 개발과 관련 비즈니스를 진두지휘했습니다. 2019년 7월 공개된 그라운드X의 퍼블릭(공개형) 블록체인 플랫폼 '클레이튼'과 올 6월 카카오톡에 탑재된 가상자산 지갑 '클립(Klip)' 등이 그의 작품입니다.
클레이튼은 메인넷(정식 서비스) 개시 1년여 만에 31개 글로벌 대기업들이 거버넌스 카운슬(Governance Council) 회원으로 참여하고 국내와 해외에서 총 76개의 파트너사를 모으며 '글로벌 블록체인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올해 론칭한 클립도 벌써 17만명이 넘는 이용자가 몰리며 국내 최대 규모의 가상자산 지갑 서비스로 떠올랐습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의 주도로 2019년 6월 가상자산 '리브라(Libra)'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본격적으로 가상자산 산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전 페이팔 사장 출신인 데이비드 마커스를 리브라 총괄 책임자로 앉히고 비자, 마스터카드 등 글로벌 기업들을 파트너로 영입하며 시장 주도권을 가져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출범 1년이 넘게 경과한 현재 페이스북 리브라 프로젝트는 아직 발을 내딛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프로젝트 자체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미국 민주당 의원들이 리브라 프로젝트에 대해 반대 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각국 중앙은행 수장들도 부정적인 발언을 일삼는 등 계속되는 견제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페이스북이 은행이 되고 싶다면 국내외 다른 은행들과 마찬가지로 은행 허가를 받아야 하며 모든 금융 규제를 따라야 할 것"이라며 리브라 프로젝트에 대해 사실상 부정적인 의견을 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커버그 CEO는 미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리브라의 목적은) 권력을 일반인에게 돌려주려는 것"이라며 "중국이 (리브라와) 비슷한 상품을 내놓기 위해 신속히 움직이고 있다. 리브라는 대부분 달러로 보장되는 만큼 미국의 금융 리더십과 민주적 가치, 세계 곳곳에 대한 감독을 확장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반박했지만, 결과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최근까지도 G7(주요 7개국)은 리브라에 대한 견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12일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G7 소속인 미국·캐나다·일본·독일·프랑스·이탈리아·영국의 중앙은행 수장들과 재무 장관들은 "적절한 규제가 마련될 때까지 '글로벌 스테이블(화폐 가치 연동) 코인 프로젝트'를 중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식성명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여기서 글로벌 스테이블 코인 프로젝트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리브라입니다.
이같은 국제적 정치 리스크에 부담을 느낀 파트너사들이 리브라 연합을 탈퇴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비자, 마스터카드, 이베이, 보다폰 등의 굵직한 기업들이 이미 리브라 파트너에서 탈퇴했으며 다른 파트너사들 상당수도 탈퇴에 대해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클레이튼 네트워크의 공동 운영을 담당하는 '거버넌스 카운슬'에는 현재까지 총 31개의 글로벌 기업들이 합류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카카오와 카카오 계열사들을 비롯해 LG전자, SK네트웍스, 아모레퍼시픽, 한화시스템즈, 안랩, 셀트리온 등이 참여했으며 해외에서는 월드페이, VNG, 코코네, 바이낸스, 유니온뱅크 등이 합류한 상태입니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월드페이와 VNG입니다. 월드페이는 기업 가치만 50조원에 달하는 미국 전자결제 1위 기업입니다. 전세계 146개국에 전자결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글로벌 금융 기업인 피델리티인포메이션서비스(FIS)가 지난해 인수합병하며 후발주자들과 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습니다.
미 전자결제 분야의 1인자가 페이스북이 아닌 카카오를 택했다는 점에서 월드페이의 클레이튼 거버넌스 카운슬 참여는 그 상징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VNG는 베트남의 카카오톡으로 불리는 메신저 앱 '잘로' 운영사입니다. 잘로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입자만 1억명이 넘는 명실상부한 '대표 메신저 앱'으로 꼽힙니다. 최근 글로벌 포함 누적 가입자 수 1억명을 넘긴 카카오톡과 잘로의 사용자 수를 합치면 클레이튼은 이미 최소 2억명가량의 이용자를 기반으로 둔 서비스가 된 셈입니다.
그나마 지난 3월 국회에서 가상자산 관련 법안을 담은 특금법(특정금융정보의 보고 및 이용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돼 내년 3월 시행을 앞두고 있습니다만, 세금과 처벌에 관한 규정을 제외하곤 여전히 정해진 것이 없어 사업적인 리스크는 전혀 줄어들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는 클레이튼 사업을 담당하는 법인이 한국이 아닌 일본과 싱가포르에 설립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 기업이 운영하고 한국 사람들이 비즈니스를 주도하고 있는데 규제 문제 때문에 법인은 해외에 설립해 운영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네이버 등 다른 IT기업들도 마찬가지로 일본 법인이나 싱가포르 법인을 통해 가상자산 비즈니스를 펼치고 있죠.
미 경제지 포브스 인사이트는 모바일 결제 시장 규모가 오는 2027년 8조9700억달러(약 1경24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래 결제 시장에서 가상자산을 이용한 결제 비율은 점차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2027년 결제시장에서 1%의 시장 점유율만 차지하더라도 100조원, 10%를 차지하면 1000조원 규모의 사업이 생기는 셈입니다. 이로 부터 파생되는 수많은 일자리와 국부 유입 효과도 상당할 것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전망하고 있습니다.
이정도로 거대한 '미래 먹거리' 시장이기 때문에 카카오나 페이스북을 비롯한 글로벌 IT기업들이 규제 리스크를 각오하고서라도 선점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문재인 정부가 대한민국 산업 지형의 대전환을 추진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김범수 의장의 카카오가 차세대 먹거리를 가져다 줄지 그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입니다.
≪이 기사는 10월 18일(02:22) 블록체인·가상자산 정보 플랫폼(앱) '블루밍비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김산하 한경닷컴 기자 san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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