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국민연금공단 국정감사에선 국민연금의 석탄투자가 도마에 올랐다. 의원들은 국민연금이 한국전력 등 석탄 관련 기업의 주식 및 채권 등에 10조원을 투자하고 있다며 비판에 열을 올렸다. 올해 초까지 국민연금 이사장을 지낸 김성주 의원은 "글로벌 연기금들이 모두 탈석탄 선언에 나서는데 이러면 남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된다"며 "당장 투자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의원들이 국민연금이 투자하고 있는 석탄 관련 기업으로 지목한 기업 상당수가 국내 최대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평가기관이 선정한 ESG 우수 기업이었다. 해외 기업 중엔 풍력·태양광 세계 1위 기업을 비롯해 '가치투자의 대가'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투자한 소위 '버핏주'도 포함됐다. 정치권이 ESG투자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 없이 그저 국민연금 때리기를 위한 수단으로 석탄투자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여당, "국민연금 석탄투자 10조...투자 중단하라"
국감은 끝났지만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여전히 분주하다. 의원들의 추가적 자료 요구에 대응하고, 국감 지적 사항에 대한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가장 큰 고민거리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집중적으로 요구한 석탄투자 금지 실행 방안이다. 김성주, 신현영, 김원이, 남인순 등 여당 의원들이 "국민연금이 그린 뉴딜 정책을 강조하는 문재인 정부에 역행하고 있다"며 "다른 국내외 연기금처럼 석탄 투자 중단을 선언해야 한다"고 압박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국감장에서 의원들은 국민연금이 국내외 석탄 관련 기업의 주식 및 채권, 인프라 등 대체투자 프로젝트 등에 10조원 가량을 투자하고 있다는 점을 들며 비판을 목소리를 높였다. 신 의원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석탄과 관련해 2019년 기준 5개 국내 기업 주식에 2조 2891억원, 174개 해외 주식에 3조 2235억원 등 총 5조 5126억원을 국내외 석탄 관련주에 투자하고 있다.
한전 자회사를 비롯해 민자석탄기업, 석탄열병합 기업의 채권에 투자한 금액(3조 6940억원)과 국내 석탄화력발전소 프로젝트에 투자된 금액(4000억원)을 포함해 약 10조원 가량을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 의원들의 지적이다. 이는 7월말 기준 국민연금의 전체 기금규모 777조원의 1.3% 수준이다.
잇따르는 여당 의원들의 지적에도 국민연금은 신중한 입장을 고수했다. 김 이사장은 "주식·채권 투자 문제와 구체적으로 석탄을 사용한 산업에 직접 투자하는 것은 구분해서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효준 기금운용본부장 또한 "공모 주식에 투자된 부분은 국민연금이 국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석탄화력발전소나 석탄 터미널 등 석탄 관련 밸류체인(가치사슬)에 직접 투자하는 사모대체투자는 이미 중단했지만 석탄 외에도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복합기업들에 대한 주식 및 채권 투자는 별개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의원들의 압박에 국민연금은 일단 '백기'를 들고 몸을 낮췄다. 안 본부장은 "ESG의 중요성은 저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고 향후 강화해야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실질적인 노력을 경주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 역시 "(신규 투자 배제 선언을) 실무선에서 검토해보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소위 석탄 관련주로 지목된 기업을 투자 대상에서 배제하는 네거티브 스크리닝(Negative screening), 보다 적극적으로 해당 기업의 주식을 매각하는 월스트리트룰(Wall Street Rule) 적용 가능성을 검토해본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전 등 국내 대상 기업 5곳 중 4곳은 ESG '우수'
투자업계선 여당 의원들의 이 같은 탈석탄 압박이 다소 황당하다는 평가다. 의원들이 석탄 관련주의 예시로 제시하며 투자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 기업 상당수가 되려 환경, 사회, 지배구조 등 비재무적 요인을 고려하는 ESG등급이 우수 기업, 심지어 친환경 테마주로 꼽히는 곳들이어서다.
신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투자한 석탄 관련주는 한국전력, GS, 금호석유화학, LG상사 등 5개 종목이다. 해외 상장기업으론 미국 넥스트에라 에너지(NextEra Energy), 엑셀론(Exelon Corporation), 도미니언 에너지(Dominion Energy), 이탈리아 에넬(Enel SpA) 스페인 이베르드롤라(Iberdrola SA)등을 꼽았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신 의원이 석탄 관련주로 지목한 5개 종목 가운데 OCI와 LG상사 2개사는 ESG 환경 등급 상위 10% 안에 들어 A(우수)등급을 받았다. 한국전력과 금호석유화학 역시 상위 20% 수준으로 B+(양호)등급을 받았다. 사회, 지배구조 요인가지 고려한 ESG통합 점수에선 이들 기업 모두 A나 B+등급으로 국내 상장사 중 상위권에 들었다.
구체적으로 기업들이 추진하는 탈석탄 및 신재생에너지 확대 행보를 보면 이 기업들을 석탄 관련주로 묶어 투자 배제 등을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의문이라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한국전력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개발도상국이 건설 중인 석탄화력발전소 프로젝트에 참여해 석탄투자 금지의 핵심 타겟(목표물)이 됐다. 하지만 신재생에너지로의 에너지전환을 위해 2034년까지 현재 60기의 국내 석탄화력발전소를 절반으로 줄이는 강도 높은 사업구조 재편 작업을 진행 중이다.
OCI는 석탄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지만 전체 사업의 60% 이상은 폴리실리콘 등 태양광 관련 사업으로 구성돼있다. GS와 LG상사는 전체 자산 중 극히 일부를 해외 석탄발전 및 운송 인프라에 투자했지만 신사업으로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발전 투자를 늘리고 있다. 금호석유화학은 국내 석탄화력발전소에 쓰이는 석탄 이송을 위한 항만운영 자회사를 둬 석탄 관련주로 묶였다.
소위 석탄 관련주의 ESG등급이 높은 것은 현재 석탄 관련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해당 기업이 친환경적인지 여부를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형 ESG전략 펀드를 운용하는 한 유럽계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당장은 기존 사업인 석탄 사업을 영위하고 있더라도 친환경 에너지로의 전환을 목표로 설정하고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다면 그 기업은 ESG 우수기업"이라고 말했다. ESG를 가장 강조하는 유럽계 투자자들조차도 여당 의원들보다 관대된 기준으로 석탄투자를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바이든주' '버핏주'도 석탄관련주?..."일률적 잣대로 평가 말아야"
여당 의원들이 지목한 해외 석탄 관련주 가운덴 되려 시장에서 '친환경' 테마주로 각광 받는 곳들도 다수 포함됐다. 미국의 신재생에너지업체 넥스트에라 에너지가 대표적 사례다. 넥스트에라 에너지는 발전량 기준 태양광과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 글로벌 1위 업체다. 최근 시가총액 기준으로 엑슨모빌을 제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넥스트에라 에너지는 발전량 기준으로 풍력 및 태양광 발전 부문에서 글로벌 점유율 1위 업체다. 풍력, 태양광, 천연가스, 원자력 등 다양한 종류의 발전소를 보유한 이 회사 전체 전력 생산 중 석탄 비중은 작년 말 기준 3.3%에 불과하다. 이 회사가 신재생에너지 주도주로 포함되며 친환경 에너지 전환을 강조하는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 당선 시 수혜를 입는 '바이든 테마주'로 떠오른 이유다.
도미니언에너지는 투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자자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최고경영자(CEO)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투자에 나선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버핏 CEO는 지난 3월 코로나 사태로 증시가 폭락한 뒤 항공주 등을 매각하고 지난 7월 97억달러를 들여 도미니언에너지의 천연가스 사업 관련 자산을 인수했다.
도미니언에너지는 100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가진 미국 최대 에너지 생산·운송 업체 중 하나다. 천연가스 사업을 버크셔해서웨이에 넘긴 이유는 풍력 등 청정에너지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도미니언에너지 역시 10개 주에 전력을 공급하는 대규모 풍력 발전소를 운영한다. 기존 석탄발전소를 천연가스를 이용해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복합발전소로 전환시키는 것도 이 회사의 주요 사업 중 하나다. 토머스 패럴 도미니언에너지 CEO는 "오는 2050년까지 탄소 및 메탄 배출량 제로(Zero)회사가 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전문가들은 "무작정 석탄투자는 안된다"며 국민연금을 압박하는 정치인들의 압박이 문제가 있다고 강조한다. 탈석탄이 글로벌 투자업계의 '대세'는 맞지만 과거에 석탄 사업을 시작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석탄 관련 불량기업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한 연기금 관계자는 “이미 투자업계는 에너지 기업들이 어떻게 미래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자금을 집행하고 있다”며 “석탄이란 글자만 들어가면 무조건 투자를 막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꼬집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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