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기의 데스크 칼럼] SK가 10조 베팅한 진짜 이유

입력 2020-10-21 17:47   수정 2020-10-22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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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3위 이내에 들어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컸습니다.”

SK하이닉스가 ‘반도체 왕국’ 인텔의 낸드 사업을 인수한 배경을 묻자 SK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10조원을 베팅한 이유가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었다는 설명이다. 이석희 SK하이닉스 사장은 “이번 인수로 D램과 낸드 두 개의 날개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뒤집어 말하면 지금까지는 한쪽 날개로만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불완전 비행을 했다는 뜻이다.

이번 딜은 한국 기업이 직면한 도전과 기회의 양면을 동시에 보여줬다. 외견상 이번 ‘빅딜’로 한국은 D램에 이어 낸드플래시까지 메모리 반도체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 2위 기업(삼성전자, SK하이닉스)을 보유하게 됐다. 두 회사의 세계 시장 점유율을 더하면 70%를 웃돈다.
칼날 위에 선 한국 기업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의 토대가 되는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를 이끄는 ‘쌍두마차’를 갖게 된 셈이다. 초조해진 일본에서는 “SK가 삼성전자와 함께 시장 독주 체제 굳히기를 서두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쫓기며 세계 낸드시장에서 언제든지 퇴출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던 SK로선 천우신조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차세대 먹거리로 불리는 2차 배터리 분야도 비슷한 상황이다. 외견상으론 이른바 ‘K배터리’가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세계 1위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4위), 삼성SDI(6위)가 삼각편대를 형성하며 세계 시장의 35%를 넘게 차지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본격적인 싸움은 시작되지도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한·중·일 배터리 삼국지’에서 한 번 삐끗하면 순식간에 10위권 밖으로 밀려날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팽배하다. 삼성 관계자는 “‘졸면 죽는다’는 말을 요즘처럼 실감한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현대자동차도 예외가 아니다. 정의선 신임 현대차그룹 회장은 미래차 분야에서 가장 준비가 잘된 최고경영자(CEO)라는 평가를 받지만, 미래 모빌리티 시장에서 강력한 게임체인저가 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지난 14일 취임한 정 회장은 앞서 열린 현대차 이사회에서 “세계 최고의 자동차 회사를 만들겠다. 특히 품질은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사외이사들에게 말했다. 올 3분기 적자를 감수하고 3조원이 넘는 ‘품질비용’을 충당금으로 쌓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 데도 이 같은 의지가 반영됐다. 정 회장은 평소에도 “우리의 단점은 잘 알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쳐 나갈 것이다”는 말로 변화를 예고했다.
기업은 경제 지키는 방파제
SK하이닉스가 인텔 낸드 인수를 발표한 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베트남 하노이의 총리 관저에서 응우옌쑤언푹 총리와 세 번째 만남을 가졌다. 응우옌쑤언푹 총리는 “삼성과 ‘윈윈(win-win) 정신’으로 동행하겠다”는 말로 이 부회장에게 공을 들였다. 이날 면담에는 베트남의 정보통신부, 기획투자부 등 핵심 경제부처 고위 인사들까지 배석했다. 국빈급 환영을 한 셈이다.

코로나19로 글로벌 산업지형이 승자독식 체제로 굳어지면서 기업들은 칼날 위에 선 심정이다. 기업의 국적을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국내 대기업들이 벌어들이는 외화는 우리 경제를 지키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전대미문의 팬데믹 상황에서 기축통화국이 아닌 한국으로선 축복과도 같은 존재다. 한국 기업인들이 “끝까지 동행합시다”는 격려를 국내에서도 듣기를 바라는 건 지나친 기대일까.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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