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창세기 18장과 19장에 있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새로운 메타포를 제공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조카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그 옆 고모라의 음란한 죄상이 참담하므로 멸하겠노라 한다. 아브라함은 의인과 죄인들을 함께 죽이시겠냐며 그곳에 의인이 50명만 있어도 멸하지 말기를 간청한다. 하나님은 그러겠다고 한다. 이 의인의 숫자 50이라는 조건은 열 명까지 내려가게 된다. 그래도 하나님은 흔쾌히 아브라함의 제안을 수락한다.
이윽고 롯에게 천사 둘이 평범한 남자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소돔의 인간들은 좀비 떼처럼 몰려와 그 두 사내를 강간하려 한다. 롯은 저항해보지만 역부족이다. 이에 두 천사는 소돔 인간들의 눈을 멀게 한 뒤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만을 데리고 유황불이 비처럼 쏟아지는 소돔을 빠져나온다. 와중에,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으로 변해버린다. 지금도 사해 부근 언덕에는 뒤돌아보는 롯의 아내 모양 바위가 있다.
스무 살 무렵, AD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에 파묻혔다가 발굴된 폼페이 유적에서 지옥불에 타죽은 그대로 굳어져버린 인간들의 형상을 나는 실제로 보았더랬다. 포르노에 관한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을 내 나름대로 정치에 적용해보면, 저 ‘소돔의 인간들’은 정확히 ‘파시스트’에 해당한다. ‘정치적 성도착 상태’인 ‘대중파시즘’이 창궐하는 이곳에서, “한 번 인정된 위인에 대한 절대적 숭배만큼 위험한 것은 없고, 공적으로 신성시되는 권력에 대한 굴종만큼 큰 재앙은 없다”라던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충고를 되뇐다.
대한민국 모든 정권의 인물과 사건 대조표를 작성해 보았다. 배우들만 바뀌었지 캐릭터들은 그대로인 이 어두운 연속극의 제목을 뭐라 붙여야 할지 난감하다. 스토리와 플롯도 음정 박자만 교활하게 변이됐을 뿐 사실상 전부 서로가 서로의 표절에 가까웠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서로 가장 미워한다고 자부하는 정권들끼리일수록 가장 비슷한 구조와 내용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싸우다가 닮게 돼서가 아닌 것 같았다. 원래 쌍둥이 유전자인지도 모른다. 저들에게는 자신의 예쁘게 변장한 탐욕이 발광할 적마다 매번 묘수 같겠으나, 역사 속에서 그 끝은 단 한 번도 달랐던 적이 없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고 했지만, “한 사람이 미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하지만 그룹, 국가, 정당, 세대가 같이 미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라던 니체의 말은 유독 요즘 너무 진실로 다가와 차마 웃을 수가 없다. 앙가주망 좋아하는 지식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지식인의 본질은 ‘앙가주망’이 아니라 ‘안티테제로서의 앙가주망’이라는 점이다. 그 어떤 정권에서도 비판자로서 존재해야 그게 지식인인 것이다.
조용한 사람들의 혜안과 힘을 신뢰하는 내 평범한 친구는 하나님이 심판을 위해 보낸 천사일까, 아니면 하나님에게 의인 열 명으로 구원을 간청하는 아브라함일까. 만약 너희 중에 조용히 다 아는 이가 열 명이면 멸하지 않으리라는 말씀은 가당치 않다. 조용히 다 아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권력자가 열 명이라면 멸하지 않으리라는 말씀 또한 가당치 않다. 조용히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더 뻔뻔하게 불법을 저지르는 저 권력자들 중 단 하나만 회개해도 이곳을 멸하지 않으리라는 말씀이 온당한 지경이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은 사해 밑바닥에 소돔과 고모라가 있다고 추정한다. 타락한 권세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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