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디자인 기업’이 된 배경엔 이건희 회장이 있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을 부르짖을 때부터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디자인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 승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96년엔 “디자인을 제품을 기술적으로 완성한 뒤 거기에 첨가하는 미적 요소 정도로 여겨선 안 된다”며 ‘디자인 혁명’까지 주창했다. 하지만 “물건만 잘 만들면 되지”라는 뿌리 깊은 전통 제조업 사고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 회장의 디자인 경영은 2005년 이탈리아 밀라노가 시발점이 됐다. 당시 세계 최고의 패션 관련 박람회 중 하나인 밀라노 가구박람회를 찾은 이 회장은 “삼성의 디자인 경쟁력은 아직 1.5류다.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은 평균 0.6초인데 이 짧은 순간을 잡지 못하면 승리할 수 없다”며 ‘제2 디자인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006년 일명 ‘이건희폰’으로 불리며 삼성전자 휴대폰으로는 처음으로 누적 판매량 1000만 대를 돌파했던 ‘T100’과 보르도TV 등이 이곳을 통해 개발됐다. 삼성은 이후 미국 LA와 샌프란시스코, 영국 런던, 이탈리아 밀라노, 일본 도쿄, 중국 상하이 등 5개국 6개 도시에 글로벌 디자인연구소를 만들었다. 5년 전인 2015년에 이미 전 세계 디자인 인력이 1500명을 넘어섰다. 삼성 관계자는 “기술 이상으로 디자인이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처음으로 일깨운 사람이 이건희 회장”이라며 “디자인 삼성의 씨앗을 뿌린 셈”이라고 말했다.
당시 삼성은 2004년부터 3년간 매출이 정체하는 등 안팎에서 ‘위기론’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반도체는 부품값 하락으로 실적 부진에 시달렸고, 휴대폰은 당시 세계 1위였던 노키아와 좀처럼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 회장은 ‘창조’를 해답으로 내세웠다. 기존 업계 1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의 방법론으로는 융합을 제시했다. 카메라와 전화기를 합친 ‘카메라폰’, 낸드플래시 반도체에 로직회로와 중앙처리장치(CPU)를 결합한 ‘퓨전반도체’ 등이 2006년 이후 쏟아져 나온 삼성의 신제품들이다.
창조경영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정사각형 상자 형태 초소형 냉장고인 ‘큐브’를 선보였다. 와인이나 맥주, 화장품 등을 별도로 보관할 수 있는 제품이다. ‘냉장고는 커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깬 제품이다. 신발관리기인 ‘슈드레서’, 바퀴가 달린 TV인 ‘무버블 TV’, 요리법을 알려주는 ‘AI 오븐’ 등도 준비 중이다. 하나같이 ‘세상에 없던 제품’들이다.
업계 관계자는 “시장을 키우기 위해 기존의 상품 카테고리를 파괴하는 것이 삼성전자의 전략”이라며 “이 회장의 유산이 지금까지 삼성을 이끄는 DNA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송형석/이수빈 기자 clic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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