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은 국가 존망이 걸린 위난(危難) 앞에서 척화라는 의리와 명분보다 화친이라는 실리를 택함으로써 스스로 굴욕을 받아들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흠될 만한 짓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느 누가 자손만대의 치욕이 될 항복 문서를 쓰려 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정치가로서 적의 남하를 미리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했다.”
공원국 역사학자와 출판기획사 컬처맵의 박찬철 대표가 함께 쓴 《굴욕을 대하는 태도》에 나오는 대목이다. 최명길은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해 벌어진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으로는 “오랑캐 편을 든다”는 비난을 받고, 밖으로는 청나라에 항복 문서를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굴욕을 감내한다.
이 책은 최명길을 비롯해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무장항일투쟁을 했던 홍범도,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의 책사 범려 등 16명의 ‘굴욕 일대기’를 담았다. 이들이 고난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를 과감함, 불굴, 긍정, 인내, 신뢰, 인정, 애민, 확신 등 여덟 가지 주제어로 정리했다.
이 여덟 가지 덕목은 모두 연결돼 있다. 저자들은 “과감함은 불굴의 의지로 뒷받침돼야 하고, 강한 의지는 긍정적 태도를 부르고, 낙관은 인내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또 “많은 사람의 신뢰를 얻고,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인정과 애민 정신을 갖추면서 자기 자신을 믿는 확신을 지닌 이들은 모두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고 덧붙인다.
책 속에 소개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목숨을 담보한 굴욕을 겪으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독립국 장군 홍범도가 대표적이다. 그는 독립군이 해체되는 순간에도, 러시아 내전에 휘말리는 순간에도, 총 대신 쟁기를 드는 순간에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하는 순간에도 시종일관 긍정적이었다. 맡은 소임을 다하면 나머지는 하늘이 정한다는 호연지기를 품었기 때문이다.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 출신 당나라 군인이었다. 그는 비록 귀족 출신은 아니었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썩지 않는다’는 진리를 터득한 사람이었다. 백제의 부흥, 고구려의 부흥 등은 모두 왕족을 내세웠지만, 그들은 이미 항복한 사람들이었다. 대조영은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땅에서 스스로 건국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범려의 경우 구천이 오나라 왕 부차에게 패한 뒤 포로로 끌려갔을 때 주군 곁을 지켰다. 그는 스스로 고난을 받아들인 만큼 그 고난을 매우 냉철하게 바라봤다. 어떻게 굴욕을 극복하고 후일을 기약할 것인지 늘 고민하며 현실을 직시하고 때를 기다렸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과 에피소드가 여럿 등장한다. 서요의 건국자 야율대석, 명말 청초 시기 전제군주제의 폐단을 지적한 《명이대방록》의 저자 황종희, 시를 통해 시대의 아픔을 묘사하고 자신의 고통을 승화한 두보, 글도 못 읽는 나무꾼이지만 선종의 기틀을 닦은 혜능 등이다.
언뜻 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나열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상의 풍파를 헤쳐간 이들의 기록을 굴욕이라는 테마로 엮고, 해당 인물들에 대한 저자들의 자체적 평가를 붙여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들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해 결국 무릎 꿇으니 창피하기도 하고 당황스러운 것이 굴욕”이라고 말한다. 또 “다시 시작하는 사람에게 굴욕은 기회”라며 “굴욕을 통해 나 자신을 격려하고 더 사랑하는 것, 그것이 ‘굴욕을 대하는 태도’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