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현장에서 많이 사용하는 ‘반생’이라는 자재가 있다. 강관을 묶거나 용접철망을 만들 때 주로 사용하는 굵은 철사다. 고온 열처리로 강도를 유지하면서도 쉽게 구부러지도록 한 강선(鋼線)인데, 정식 명칭은 구운 철사 또는 ‘소둔선(燒鈍線)’이다. 반생은 일본어 ‘번선(番線·ばんせん)’을 발음대로 부르는 것으로, 철사 굵기에 따라 숫자를 붙여 ‘O번선’이라고 부르는 데서 유래했다.
조각가 김주환(46)은 이 구운 철사로 작품을 제작한다. 강원 횡성군 우천면 하대리의 창고 건물에서 강선을 둥글게 말고 용접해서 붙인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한 강철선의 원은 점차 크기를 늘려가며 동심원으로 확장된다.
강선의 동심원은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된다. 여러 개의 동심원이 하나의 평면에서 만나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기도 하고, 평면을 빼곡히 채운 작은 사각형 위에 얹히기도 한다. 또 쌓여 스피커를 닮은 원뿔형을 이루기도 하고, 여러 개의 원뿔이 붙어 삐죽삐죽한 다면체를 만들기도 한다.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2020 오늘의 작가전-김주환: 혼방된 상상력의 한 형태’에서 그의 이런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평면 및 입체 작품 14점을 선보이고 있다. 커다란 검은색 동심원 앞에 서면 우주의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다.
전시 제목의 ‘혼방된 상상력’은 창작을 위한 김 작가의 발상에 관한 얘기다. 그는 “작업이란 머릿속에 혼재한 기억과 지식의 파편들을 능동적인 상상작용을 통해 형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상상작용은 사유와 다르지 않다. 그는 “사유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작품이라는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라고 비유했다.
다양한 상상과 사유를 바탕으로 진행하는 작업 과정은 성질이 다른 실로 천을 직조해내는 혼방(混紡)과도 같은 것이다. 재질과 무늬, 용도가 다양한 혼방 섬유처럼 그는 혼방된 상상력으로 기기묘묘한 작품을 빚어낸다. 원과 원, 원과 사각·육각·다면체 등 다양한 혼용을 통해 새로운 우주가 탄생한다.
전시에는 ‘사이렌의 노래 혹은 예술의 본질에 대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이렌은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을 유혹해 배를 난파시키는 마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도 사이렌이 나온다. 전쟁터를 떠나 배를 타고 귀향하던 오디세우스는 밀랍으로 선원들의 귀를 틀어막아 그 위험을 벗어나도록 했다고 한다.
김 작가는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단순한 귀향이 아니라 죽음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 빛과 생명으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며 “불교의 육바라밀 가운데 인욕(忍辱)과 지혜로써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생명을 회복한 오디세우스를 통해 코로나19로부터 일상을 회복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상력을 펼친 그의 작품은 제목부터 독특하다. ‘태양신의 황소’ ‘사이렌의 침묵’ ‘두집 사이를 서성이는 늙은 아해를 위하여’ 등의 부제가 달린 ‘자웅동체’ 시리즈, ‘천의 고원 혹은 천개의 달그림자’ ‘만 가지 상념을 단번에 깨뜨리다’ 등 불교적 색채의 제목까지 다양하다. 박춘호 김종용미술관 학예실장은 “김주환은 불교적 번뇌와 깨달음을 작품에 담고 있다”며 “그의 작업은 고통과 혼미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얻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평했다.
김주환은 2002년부터 하대리에서 조각과 농사를 겸하고 있는 농부 작가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동심원을 만들어 나가는 그의 작업도 인욕과 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유혹과 칭찬, 어느것에도 흔들리지 않겠노라고.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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