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당선 연설을 위해 무대에 올라온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은 달랐다. 여성참정권 운동을 상징하는 흰색 슈트를 입고 무대에 등장했다. 자신의 메시지를 직접 전달했다. 미국 첫 흑인·아시아계 여성 부통령이 된 자신을 통해 미국이 ‘가능성(possibility)의 나라’라고 강조했다. 바이든을 돋보이게 했지만, 뒤에만 서 있지도 않았다.
해리스는 바이든의 러닝메이트로 지목됐을 때부터 주목받았다. 바이든은 올해 77세. 4년 뒤 연임에 도전하는 것은 무리란 얘기가 나온다. 그래서 50대 중반인 해리스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들 한다.
해리스는 자메이카계 교수인 아버지와 인도계 과학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국 사회의 ‘주류’는 아니다. 그런 그에게 ‘첫’이란 타이틀은 낯설지 않다. 캘리포니아주의 첫 흑인 여성 선출직 지방검사였고, 첫 여성 검찰총장 겸 법무장관이었다. 2017년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이 됐을 땐 흑인 여성으로선 두 번째, 인도계로선 첫 상원의원이었다. 해리스는 작년 1월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1차 TV토론에서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이야기하며 ‘흑백 학군통합 정책’에 반대한 적이 있는 바이든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 같은 ‘전사(戰士)’ 이미지 때문에 경선을 포기한 뒤 바이든의 약점을 보완할 부통령 후보로 발탁됐다. 그가 표심을 움직이는 데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해리스의 좌우명은 “네가 처음일지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이어선 안 된다(You may be the first, but make sure you’re not the last)”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해준 말이다. 이 좌우명은 살짝 바뀌어 당선 수락 연설에 등장했다. “내가 이 자리(부통령)에 앉게 된 첫 번째 여성일지는 모르지만,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이유도 덧붙였다. “오늘 밤을 지켜보는 모든 소녀가 이곳이 가능성의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고.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건국했고, 이후에도 인종과 문화적 다양성은 계속 확장됐다. 내재적 갈등을 제도와 시스템을 바탕으로 극복해왔다. 미국이 전 세계 리더로 인정받아온 데엔 군사력, 경제력 같은 ‘하드파워’뿐 아니라 문화, 교육제도와 같은 ‘소프트파워’도 함께 작용했다. 그 키워드는 자유와 꿈, 가능성이다.
한국도 미국 못지않은 가능성의 나라였다. 출신보다 능력과 열정이 성공의 크기를 결정했다. “개천에서 용 났다”라는 얘기를 많이들 했다. 농부의 아들이 사장이 되고, 법관이 되고, 대통령도 됐다. 시골에서 상경한 많은 근로자가 자신의 노력으로 중산층이 됐다. 1990년대 중반 사회에 본격 진출하기 시작한 여성들도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대기업과 공공기관 곳곳에서 요직을 맡아 기반을 넓혀가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사다리가 사라졌다”는 얘기가 더 많이 들린다. 계층이동의 가능성이 줄었고,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역동성이란 단어도 듣기 힘들어졌다. 정부 정책은 가능성과 역동성을 키우기보다 성공한 사람들을 가두는 쪽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해리스 부통령을 보며 저 시골에서 나도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꿈꿀 수 있는 소녀가 있을까. 미국 대통령 선거가 한국에 주는 교훈은 여러 가지다. 그중 가장 큰 교훈은 어쩌면 “다시 가능성의 나라, 코리안 드림, 그 역동성을 살리는 데 집중하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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