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수준에 그치면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고 보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자유와 권리의 원천이고, 국민 삶의 질 개선과 국가 번영의 ‘필요조건’이다. 하지만 책임과 의무, 견제와 균형, 법의 지배(법치)라는 까다로운 ‘충분조건’을 갖춰야 비로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수준일까.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의 ‘민주주의 지수’에서 한국은 10점 만점에 8.0으로 23위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은 맨 꼴찌(167위)다. 한국은 ‘완전한 민주주의’ 22개국에는 못 들었지만 ‘결함 있는 민주주의’ 37개국 중에선 맨 앞이다. 뒤로 일본(24위) 미국(25위) 대만(31위) 등이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군사독재 시절 민주주의는 희소하고 귀한 가치재였다. 그렇기에 ‘타는 목마름으로’ 더 목말라 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한 세대가 지났건만 완전한 민주주의 단계에 도달했다고 장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의 대전제인 삼권분립의 ‘견제와 균형’에 비춰보면 분명해진다. 제왕적 권력 아래 여당은 전위대 역할을, 행정부는 욕받이 역할을 맡은 듯하다. 사법부는 바람이 불기도 전에 알아서 눕는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세다가 포기했다는 ‘내로남불’이나 ‘내편 무죄, 네편 유죄’가 너무 흔해 익숙해질 정도다.
정치권이 자주 언급하는 ‘민주적 통제’도 그렇다. 권력기관의 자의적 권력 오남용을 막는 것이라면 그냥 법치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민주적 통제라고 굳이 못박는 것은 선출직이 임명직을 다스리겠다는 뉘앙스를 풍겨, ‘(더불어)민주당에 의한 통제’로 들린다는 비판이 나온다. 게다가 ‘민주’ 간판을 단 단체들이 되레 반(反)민주적 행태를 보이기 일쑤고, 민주화 경력을 내세운 이들은 특권과 세습 늘리기가 점입가경이다. 대통령 취임사의 감동적인 ‘공정과 정의’가 빛바랜 정치구호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음 선거밖에 보지 못하는 ‘근시안 정치’에 나라 미래가 안중에 있을 리 없다. 집요한 스토커처럼 기업을 괴롭히고, 개인 자유를 너무 쉽게 규제하고, 국민 감시와 징벌을 당연시한다. 공평해야 할 세금조차 합법을 빙자해 징벌적 약탈 수단으로 악용한다. 상위 10%에게 세금폭탄을 안길수록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표 계산이 우선이다. 이런 게 다 민주주의라는 이름하에 자행되고 있다.
무엇이든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 만고의 진리다. 자유가 과하면 방종이고, 권리가 지나치면 무책임이다. 일상에서도 ‘너무 과한 정보’는 ‘TMI(too much information)’이라는 핀잔을 듣기 십상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어서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말’이 차고 넘쳐서 문제다. 사실 유권자들도 선거 때마다 대충 찍고 후회하고, 사탕발림 공약에 쉽게 넘어가니 민주주의를 망치는 데 책임이 없지 않다.
가렛 존스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10% 적은 민주주의》에서 잦은 선거와 포퓰리즘 유혹, 중우정치 가능성 등을 들어 1인 1표 대신 지식인에게 가중치를 부여하고 정치인의 임기를 늘리자는 등 도발적인 제안을 던졌다. 이에 동의하기 어렵고 실현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지금 민주주의가 ‘고비용 저효율’의 임계점을 넘고 있다는 지적은 부인하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착한 권력’은 존재한 적 없다. 견제와 절제가 없으면 ‘민주 과잉 증후군’일 뿐이다.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국가란 인간이 선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애써서 건설해가야 하는 사회 형태”라고 갈파했다. 이런 진실을 사회 구성원들이 자각하고 성찰하는 것만이 민주주의를 타락의 늪에서 건져낼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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