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만큼 한국인의 애환이 깃든 술이 있을까. 힘들고 지칠 때, 오랜 친구들과 한잔할 때도 늘 손이 가는 술이 소주다. 상사와 선배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마신 술도 소주였다. 그래서 혹자는 “초록색 소주병을 보면 회식 냄새가 난다”고까지 말한다.
초록색 소주병의 역사는 199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산이 강원도 소주기업 ‘경월’을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새로운 콘셉트의 제품이 필요했던 두산은 강원도의 푸른 녹음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고 ‘그린 소주’를 내놨다.
뒷이야기도 있다. 1991년 두산전자가 낙동강에 유해물질인 페놀을 흘려보내 문제가 됐다. 페놀 유출로 기업 이미지가 나빠진 두산은 브랜드 개선책이 필요했다. 맥주에 이어 소주 사업에 진출하면서 제품명에 ‘그린’을 넣고, 병의 색상도 ‘초록색’으로 결정했다.
초록색 병 ‘그린 소주’는 대성공을 거뒀다. 1999년 단일 제품으로 30%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소주 시장 1위에 올랐다. ‘소주=초록병’이 된 데는 경쟁사인 진로의 역할도 있었다. 1998년 진로가 참이슬을 출시하면서 병 색깔을 그린 소주처럼 초록색으로 바꿨다.
참이슬과 그린 소주는 광고 전쟁도 벌였다. 그린 소주는 참이슬을 흘러간 노래, 지나간 소주에 비유했다. 진로는 ‘왜 그런 소주를 마시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광고를 제작했다. ‘그린’을 ‘그런’으로 빗대 비꼬는 카피였다.
소주 양대 산맥의 전쟁 속에서 소주업체들은 소주병을 초록색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초록색 소주병이 가장 많이 만들어지고, 재사용되는 기본 공병이 됐다.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소주병의 표준이 됐다.
이후 두산은 그린 소주의 차별화를 위해 ‘산 소주’를 내놨다. 소주에 녹차를 넣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 ‘산 소주’를 ‘처음처럼’으로 바꿨다. 그리고 2009년 롯데주류가 두산으로부터 소주 사업을 사들였다.
‘경월 소주’는 아직 살아 있다. 일본에 있다. 롯데주류가 경월 브랜드로 꾸준히 수출하고 있다. 일본 전체 희석식 소주 판매량 2위를 차지할 만큼 인기다.
잊혀진 브랜드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레트로와 뉴트로의 시대, 경월 소주를 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명욱 < 주류문화칼럼니스트 >
술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는 주류 전문가. 10여년 전 막걸리 400종류를 마셔보고 포털 사이트 지식백과에 정보를 제공한 것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 과정 주임교수 및 세종사이버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 '말술남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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