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와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슈퍼돼지 옥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옥자’(감독 봉준호, 2017). 영화 속 환경운동가 집단인 ‘동물해방전선’은 서울 한복판에서 옥자를 납치했다가 다시 풀어준다. 유전자 조작으로 옥자를 탄생시킨 글로벌기업 미란도그룹의 뉴욕 실험실 내부를 촬영하기 위해 옥자의 귀 아래에 블랙박스를 심은 뒤다. 회사 이미지를 개선하려는 미란도그룹이 미자를 뉴욕으로 초대해 옥자와 감동적인 재회 이벤트를 여는 순간, 동물해방전선은 미란도그룹이 돼지를 강제로 교배하고 전기충격기로 학대하는 등 비윤리적으로 사육한다고 폭로한다.
소비자의 거센 항의에도 미란도그룹 수장인 낸시는 끄떡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장을 최대한 가동해 돼지고기 생산량을 늘리라고 주문한다. 합리적인 경제인이라면 품질 좋고 가격까지 싼 제품을 외면할 리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가격이 싸면 사람들은 먹어. 초반 매출이 아주 좋을 거야. 내가 장담하지.”
영화의 마지막. 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미자는 미란도그룹에 순금으로 값을 치르고 옥자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 미자가 구한 건 옥자뿐이다. 다른 돼지들은 아직 거기에 있다. 동물복지가 중요하다고 믿는 소비자가 늘어 불매운동에 성공할 때 다른 돼지들도 자유를 찾을 것이다.
동물복지를 실현하는 것과 좋은 품질의 고기를 값싸게 제공하는 것.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는 판단의 영역이다.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에게 양질의 동물 단백질을 제공하는 문제 역시 동물 복지와 비교해 결코 가볍지 않다. 투표가 세상을 바꾸듯 소비도 세상을 바꾼다. 각자의 소비가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갈 뿐이다.
넷플릭스는 이 판을 완전히 흔들었다. 영화 개봉 후 부대수입으로만 여겨졌던 주문형 비디오(VOD) 서비스를 전면에 내세웠다. 영화관뿐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도 스크린으로 인정해 달라고 나섰다. 영화관이 영화 상영을 독점하는 구조를 깨고 소비자가 원하는 곳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산업 구조의 틀을 깨는 혁신 기업의 등장은 기존 경제주체의 반발을 부른다. 옥자 개봉 당시 국내 스크린 점유율 98%를 차지한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옥자 상영을 거부했다. 칸 영화제에서도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옥자를 영화로 볼 것이냐로 논란을 빚었다. 칸 영화제에서 옥자가 상영됐을 땐 관객 야유로 상영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자인 조지프 슘페터는 이런 현상을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로 설명했다. 기술혁신은 기존 질서를 파괴한다. 그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 혁신으로 낡은 것이 파괴되고 새 질서가 생기는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한다는 게 창조적 파괴 이론의 핵심이다. 우버 등 차량공유 서비스와 택시업계 갈등, 에어비앤비와 숙박업계 갈등 역시 기존 산업 구조를 바꾸는 혁신기업 등장으로 생긴 일이다.
기존 산업계 반발에도 변화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변화는 더 앞당겨지는 추세다. 아카데미 시상식은 92년 전통을 깨고 올해는 영화관에서 개봉하지 않은 영화도 출품하도록 허용했다. 한국 영화 ‘사냥의 시간’은 지난 4월 영화관 개봉 없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서 최초 공개됐다. 넷플릭스 등 OTT가 투자한 영화가 아닌 작품이 OTT에서만 개봉한 건 사냥의 시간이 처음이다.
나수지 한국경제신문 기자 suji@hankyung.com
② 유전자조작(GMO)으로 더 품질 좋고 값싼 고기를 만들어내는 것과 동물복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옳다고 보는가.
③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로 영화관 관객은 급감한 반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이용은 급증하고 있다는데 코로나 사태가 끝나도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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