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물 설계·제어하는 합성생물학…진료·치료 동시에 가능해진다

입력 2020-11-17 15:16   수정 2020-11-17 15:19


몇 년 전에 아내와 두 딸아이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간 적이 있다. 영화 ‘리틀 메딕: 몸속탐험대’를 보기 위해서였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호기심 많은 12세 소년 나노는 할아버지가 악당 슐로터 박사에게 속아 고봇이라는 수상한 약을 먹고 조종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노는 닥터X의 도움으로 몸이 아주 작아지고, 초소형 캡슐인 ‘리틀 메딕’을 타고 할아버지 몸속에 들어가 수많은 미생물 중 고봇을 찾아 퇴치한다. 독일 의사 과학자 디트리히 그뢰네마이어가 쓴 과학 동화 《나노의 인체 탐험》을 원작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사람 몸 안으로 들어가 인체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으로 미래 의학 기술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지구상 미생물 종 약 1조 개
영화에서처럼 우리는 수많은 미생물과 함께 살아간다. 인간은 하나의 종이지만, 우리와 함께 지구에 살고 있는 미생물의 종은 약 1조 개나 된다. 각 개체의 세포 수를 다 합쳐도 미생물 세포 수가 인간의 1000만 배에 이른다.

그렇다면 과연 지구의 주인은 누구일까. 숫자로만 보면 지구의 주인은 미생물이며, 우리는 미생물과 함께 살고 있는 손님 정도다. 실제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장내 미생물은 우리의 건강을 좌우한다. 잘 관리해준다면 장내 미생물은 훌륭한 ‘리틀 메딕’이 될 수 있다.

우리 몸에 살고 있는 미생물이 건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2006년 제프리 고든 미국 워싱턴대 박사의 흥미로운 연구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든 박사는 비만 쥐와 마른 쥐의 분변에서 회수한 미생물을 무균 쥐에 주입했다. 그 결과 비만 쥐의 미생물을 주입한 무균 쥐가 마른 쥐의 미생물을 주입한 무균 쥐보다 더 빠르게 비만이 되는 것을 확인했다. 즉 비만한 개체와 마른 개체의 장 속에 사는 미생물 종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또 여자 쌍둥이 중 비만한 쌍둥이와 마른 쌍둥이의 분변에서 얻은 미생물을 무균 쥐에 주입한 결과, 앞선 연구 결과와 마찬가지로 비만한 쌍둥이의 미생물을 주입한 무균 쥐가 더 빠르게 비만이 되는 것을 확인했다.

이후 우리의 장 속 미생물이 염증성 장질환, 과민성 장증후군 같은 소화기 질환뿐만 아니라 당뇨, 파킨슨병, 자폐증까지 다양한 질병과 연관돼 있다는 연구 결과가 연이어 보고됐다. 그래서 장 속 미생물은 우리 몸의 ‘제2의 장기’라고 불리며 건강한 장 속 미생물이 곧 건강한 신체를 만들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형성해가고 있다.

최근 자폐를 앓고 있는 아이가 정상인 아이에 비해 더 높은 비율로 변비, 설사와 같은 위장 장애를 앓을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실제 미국에 살고 있는 한 자폐 소년은 7년 동안 설사로 고생하다가 원래 살고 있던 장 속 미생물을 없애고 새로운 미생물들로 바꿔주니 설사가 멈추고 자폐증도 호전됐다.
살아있는 프로바이오틱스 개발
요즘 유산균과 같이 우리 몸에 이로운 미생물인 프로바이오틱스를 건강을 위해 꾸준히 먹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바이오틱스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연구와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이는 프로바이오틱스 수는 매우 많지만 아직 어떤 미생물이 어떤 사람에게 유익한지, 유익하지 않은지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최근 이런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프로바이오틱스가 건강의 보조적 역할에서 벗어나 리틀 메딕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더 똑똑하게 만들려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합성생물학을 이용한 연구가 있다.

프로바이오틱스가 질병 치료에 이용되기 위해서는 질병의 표지물질, 즉 바이오마커를 인식해 질병을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해당 질병의 치료제를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프로바이오틱스는 장 속에 정착해 잘 사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장기간 장 속에서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살아있는 약을 개발할 수 있다. 그렇다면 프로바이오틱스는 장 속에 살면서 바이오마커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합성생물학의 유전자 회로를 프로바이오틱스에 장착하면 된다. 유전자 회로는 바이오마커와 같은 특정 물질을 인식하면 형광 물질을 생산해내도록 DNA를 설계한 일종의 바이오 센서다. 우리는 형광 물질이 반짝이는 것을 확인해 바이오마커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형광 물질 대신에 치료제 역할을 하는 물질을 생산할 수 있도록 설계한다면, 살아있는 프로바이오틱스 약이 탄생할 수 있다.

살아있는 약으로 개발하기 위해 사용되는 많은 프로바이오틱스 중 대표적인 미생물은 ‘대장균 니슬 1917’이다. 이 미생물은 1917년 독일의 알프레드 니슬 박사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독일군 병사의 대장에서 처음 분리한 미생물로, 그의 이름을 따라 대장균 니슬 1917로 명명됐다. 이 대장균은 사람의 대장에 살면서 유해균 번식을 막고, 위장 장애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현재는 의사의 처방전이 있으면 구입할 수 있는 의약품으로 판매되고 있다. 실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위장 장애와 복부 팽만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되기도 했다.
합성생물학, 진단과 치료 동시에
최근 국내에서도 프로바이오틱스인 대장균 니슬 1917을 이용해 살아있는 약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합성생물학전문연구단은 장에 발생한 염증의 바이오마커인 질산염을 인식해 형광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유전자회로를 개발해 대장균 니슬 1917에 장착했다. 이렇게 똑똑해진 대장균 니슬 1917을 실험동물 쥐에 주입해 6일 동안 관찰했더니 쥐의 장 속 염증이 심해지자 쥐의 분변에서 형광 세기가 비례해 증가했다. 즉, 프로바이오틱스가 쥐의 장 속에 살면서 염증의 발생을 알려준 것이다.

또 해당 연구진은 염증의 진단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염증의 또 다른 표지물질인 티오황산이 질산염과 동시에 장 속에 존재할 때만 형광 물질을 만들어내는 유전자 회로도 개발했다. 이는 국내 합성생물학 기술이 헬스케어 분야의 새로운 적용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앞으로 형광 물질 대신 염증을 치료할 수 있는 천연물을 생산해 진단과 동시에 치료가 가능한 프로바이오틱스의 개발도 기대되고 있다.

이처럼 수많은 우리 몸속 미생물을 목적에 맞게 직접 설계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 잠재력은 엄청날 것이다. 합성생물학을 통해 정교해진 미생물의 DNA 설계와 제어 기술이 치료에 사용된다면, 리틀 메딕의 개발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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