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정치에 휘둘리게 될 통화정책

입력 2020-11-23 17:44   수정 2020-11-24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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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과 야당 두 국회의원이 공동으로 한국은행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한은의 설립목적에 물가안정 외에 고용안정을 추가하는 내용이다. 한은이 물가안정만 고집하지 말고 고용안정에도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취지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고용충격에 한은이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고, 미국 호주 캐나다 등의 중앙은행도 통화정책 목표에 고용안정을 두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외국이 하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 할 일은 아니다. 개정하려면 과연 고용안정이 통화정책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일인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물가안정 목표와 고용안정 목표는 서로 상충된다. 중앙은행이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란 대단히 어렵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역사를 봐도 그렇다. 더 본질적인 것은 통화정책으로는 고용안정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이다. 새로운 재화가 창출돼야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도 늘어나는 법인데 통화정책을 통해 화폐량을 늘린다고 해서 새로운 재화가 창출되진 않기 때문이다. 화폐는 어디까지나 교환의 매개체다. 우리는 화폐를 받고 어떤 사람에게 자신이 생산한 재화를 제공하고, 받은 화폐로 다른 사람이 생산한 재화를 구매한다. 교환할 때 화폐가 오가지만 실질적으로 교환되는 것은 내가 생산한 재화와 다른 사람이 생산한 재화다. 화폐는 사람들이 생산한 재화의 교환을 용이하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모든 사람의 생산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중앙은행이 화폐량을 늘리면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생산이 뒷받침되지 않은 소비가 발생한다. 생산이 뒷받침되는 소비에 따른 교환이 ‘유(有)와 유(有)의 교환’이라면, 화폐량 증가로 인해 생산이 뒷받침되지 않는 소비에 따른 교환은 ‘유(有)와 무(無)의 교환’이다. 이것은 늘어난 화폐량을 더 많이 입수한 사람에게로 이미 생산돼 있는 많은 재화가 이동함을 의미한다. 화폐량 증가는 생산된 재화를 재분배할 뿐 새로운 재화를 창출하진 않는 것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이 통화정책을 통해 화폐량을 대폭 늘렸지만 경제 성장은 촉진하지 못한 채 소득불평등만 악화시켰던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중앙은행의 임무는 누가 뭐래도 물가안정, 즉 화폐가치 안정이다. 화폐가치가 안정되지 않으면 경제 전체가 불안정해지고 시장이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격통제 등 외부의 힘에 의해 가격이 왜곡되면 생산과 소비의 시장조정과정이 왜곡돼 시장이 파괴되고 경제 문제가 속출한다. 모든 가격은 화폐로 표기된다. 그래서 화폐가치가 불안정해지면 재화의 가격이 불안정해지고 왜곡돼, 가격이 왜곡됐을 때 초래되는 것과 똑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최근 통화가 팽창했음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고용안정과 경기부양을 위해 더 많은 통화를 풀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인플레이션은 400~500개 품목을 대상으로 한 소비자물가지수로 계산된 것이다. 지금 소비자물가지수로 계산한 인플레이션 문제는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가격이 크게 올라 자산 인플레이션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소비자물가지수를 보고 통화정책을 판단하면 커다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2008년 금융위기를 촉발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고용은 민간부문의 생산활동에 달려 있다. 민간부문의 생산활동이 활발하면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가 늘어나 고용이 증가하고 실업이 감소한다. 일자리 증가를 위해서는 민간부문의 생산활동이 활발해지도록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기업과 기업가의 활동을 옥죄는 각종 규제를 제거하고, 노조를 위한 정책에서 벗어나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해야 한다.

통화정책으로 고용안정을 도모하라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아도 경기부양과 관련해 정치적 압력을 가하고 경기부양의 책임을 한은에 떠넘기는 일이 허다하다. 만약 한은의 통화정책 목표에 고용안정을 추가하면 정부와 정치권이 대놓고 경기부양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통화정책은 더욱 정치에 휘둘리게 되고 경제 불안이 심해지는 것은 불문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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